제자가 된다는 것

하나님을 바라보고, 인간을 탐구함- 로완 윌리엄스의 제자가 된다는 것(Being Disciples)

수많은 책을 접하면서, 어떤 책은 두께가 두껍고 어려운 내용이 담겨 있는데도 별로 담겨 있는 내용이 별로 없다고 느끼게 되는 책이 있는가 하면, 어떤 책은 얇고 (표면상으로는) 꽤 쉬운 내용이 담겨 있는데도 그 묵직함에 여러 번 묵상하게 되는 책도 있습니다. 로완 윌리엄스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영어판으로는 88쪽 짜리, 한국어판으로도 토론을 위한 질문까지 모두 합쳐도 총 140쪽에 지나지 않는 책입니다. 총 6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기독교 신앙을 공적이면서도 개인적인 것으로, 학문적 영역에 속했으면서도 실존적인 것으로, 또한 교회의 삶에 속했으면서도 평일의 삶에도 속한 것으로 그려내기 때문에, 그 얇기와는 달리 쉽게 읽어낼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이 서평을 쓰는 저는 현재 이 책을 두 번 읽었습니다만, 읽으면 읽을수록 그 내용의 무게를 제대로 감당하고 소화해 내려면 앞으로 꽤나 자주 꺼내 읽고 기도하며 묵상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체 6장은 첫 장에서 제자가 된다는 말에 대한 개론적이면서도 신학적 성찰이 담긴 묵상에서 시작하여, 믿음, 소망, 사랑을 지성, 기억, 의지와 연결시켜서 현대적 맥락 속에서 새롭게 풀어내고 (2장), 용서함과 용서 받음에 담긴 인간됨의 의미를 삼위 하나님의 관계와 삶에서 깊게 끌어올려내며 (3장), 거룩함에 대한 우리의 종교적이고 율법적인 편견을 제대로 박살 내고 (4장), 공적 신앙이 세속화된 사회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단순히 구조적이고 학문적인 차원에서가 아닌, 개인적 실천과 공동체적 삶이라는 차원에서 풀어내고 (5장), 마지막으로 성령 안에서의 삶을 자기 이해, 평정, 성장, 기쁨이라는 네 개의 주제로 풀어내면서 책을 마칩니다 (6장).  각각의 장에서 윌리엄스가 다루어내는 주제의 묵직함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카테고리를 모두 흔들어 버리고, 그가 말하듯이 “예수를 중심으로 실재를 재구성”(31)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제대로 독자들의 마음에 각인시킵니다. 때문에 140쪽이 아니라 600-700쪽으로 느껴질 정도로 성찰의 깊이가 느껴지는 책입니다.

1장에서 윌리암스는 고대 사회에서 제자가 된다는 말은 현대인들이 생각하듯이 그저 수업 시간에 참여하고 토론을 몇 번 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시작합니다. 제자가 된다는 말의 원어적 의미가 “함께 묵는 일,” “함께 머무는 일”과 관련되어 있음을 요한 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너희는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라는 말로 대변됨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제자가 된다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단지 고대 사회의 풍습이 그러했기 때문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와 관계 맺고자 하는 방식이 우리가 그 분 안에 머무는 것, 그 분께서 가시는 길을 잘 살피고, 그  분께서 가시는 곳에 우리도 함께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가 그 분의 무리, 그 분의 백성 안에 속하게 된 것은 그 분께서 가시는 곳, 그 분께서 택하시는 상처 받고 힘없는 사람들의 무리 속에 우리 또한 함께 하고, 우리 또한 그들과 같이 연약한 존재임을 주님 앞에 인정하며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19세기에 페르시아만 지역에서 선교 사역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사역에 별 열매도 없이 삶을 마감했던 토마스 프렌치(Thomas French) 의 삶의 이야기는 아주 강력합니다. 윌리엄스는 말합니다.  “무엇이 그를 그 곳으로 이끌었을까요? 예수께서 계신 곳에 함께 있겠다는 열망, 자기가 찾는 사람들의 영혼 속에도 예수에 대한 지식이 싹트고 활짝 꽃피기를 바라는 마음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오랜 세월 중동 지역에서 사역하면서도 전혀 회심자를 얻지 못했다 해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가 그 곳으로 갔던 첫째 목적은 회심자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38)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이야기에는 결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가 계신 곳에 함께 있는 일에 관심을 두는 제자도가 어떤 모습인지를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38).

하지만 한 편으로 제자도란 어딘가로 떠나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실 예수께서 계시는 곳은 다른 그 어떤 곳보다도 “아버지의 마음”(요 1:18)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멀리 떠나간다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의 품속에 머무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두가지가 모순되거나 상충되지 않음을 배워가는 것이 제자의 삶이라고 윌리엄스는 말합니다.

2장에서 윌리엄스는 지성과 기억, 의지에 대해서 꽤나 철학적인, 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묵상에서 시작해서, 지성에서 믿음으로, 기억에서 소망으로, 의지에서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오늘날의 지성이란 도구적인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교육의 목적을 논하면서 그 주된 목표는 사람들을 경제적인 면에서 훨씬 더 경쟁력 있게 만드는데 있다고 주장하는 공식 문헌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주장이 무엇을 말하든지 간에 나로서는 그것이 지성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52)라고 말합니다. 지성은 현대 사회에서 버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지성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정신을 넓혀서 더욱 풍성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는데,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현대 사회에서는 상실되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추구할 수 있고, 그것을 알 수 있으며, 그로 인해서 더욱 풍성한 삶을 영위하는 것 자체에 대한 희망을 버린 시대, 윌리엄스는 16세기의 수도사인 십자가의 성요한을 말하면서 그가 “우리의 지성 앞에 놓인 ‘장벽’을 인식하고 이해력을 휘어잡은 혼돈과 상실을 깨닫는 데서부터 진정한 의미의 신앙이 자라난다”고 말하는 것을 인용합니다. 즉, 다시 말하자면, 지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말은 지성이 가진 능력 또한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뢰할 수 있는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아주 단순하게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떠나가지 않으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56) 사람들입니다. 지성이 아무 것도 알 수 없게 된 시대, 오직 도구적인 용도로만 활용되는 시대, 믿음은 지성을 풍성하게 회복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지성이 가지 못하는 길을 갈 수 있도록 열어줍니다.

기억이 현대 사회에서 가진 주된 이슈는 흩어짐과 분화입니다. 이런 문제는 곧바로 정체성의 이슈로 연결됩니다. 한 지역에서 한 공동체 안에서 살면서 정체성이라는 질문을 거의 던져 볼 필요가 없었던 옛 사람들과 달리, 현대인들은 조각난 기억들 속에서, 쪼개진 공동체들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렇게 분화되고 분열된 삶의 이야기로 인해서 내가 과연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된 시대, 그래서 누구나 다 자신의 정체성을 묻고 또 물으면서도 여전히 답을 얻지 못하는 시대, 윌리엄스는 소망이 그 갈 길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소망이란 “우리를 떠나가거나 포기하지 않는 존재와의 관계, 우리가 누구였으며 지금 누구인지 알고 이해하며 그대로 붙잡아주는 실재와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59)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의지가 현대 사회에서 처한 문제는 의지와 선택의 전제가 되는 자유는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마음이 가장 원하고 바라는 것, 즉 사랑하는 것에 묶여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사실 제가 좋아하는 팀 켈러나 제임스 스미스가 각각 자신들의 저서와 강연에서 했던 말이어서 더욱 와 닿았습니다. 윌리엄스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다시 말해, 매순간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장한다는 의미에서 “우리 자신”이 되는 자유가 아니라, 우리의 삶 깊은 곳에 흐르는 변화의 물결을 느리지만 끈기 있게 찾아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대로 자라가는 삶의 자리를 발견하는 자유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원하고 선택하는 일은 이러한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진공 속에서 행하는 일이 아닙니다” (64). 따라서 의지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사랑의 문제이며, 사랑이란 결국 “우리를 떠나가지 않으시는 신뢰할 만한 존재, 우리의 과거와 현재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시고 한결같은 눈길로 응시하시는 존재, 우리가 누구인지를 영원토록 흔들림 없이 증언하시는 분, 그 존재가 바로 사랑입니다” (65).

3장에서 윌리엄스는 용서와 인간됨에 대해서 성찰합니다.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각각 우리가 받은 상처 때문에, 우리가 받게 될 치욕 때문에 우리가 쳐 놓은 안전 지대에서 나오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안전 지대에서 나오게 될 때만이 비로소 온전하게 회복되는 인간됨의 길을 걸어갈 수 있고, 따라서 용서를 한다는 것,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비록 그 자체로 위험하고 모험의 길이지만, 우리는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제가 말한 것보다 훨씬 더 명료하게, 훨씬 더 설득력 있게, 윌리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용서를 구하는 사람은 의롭거나 안전하게 되는 권리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치유받을 필요가 있으며 수용과 관계 회복이라는 양식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용서를 베푸는 사람도 역시 억울한 희생자라는 처지를 앞세워 확보한 안전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는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관계를 맺는 모험에 나서기로 결심합니다. 용서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모두 안전지대 밖으로 밀려납니다. 그들은 자기네 인간성을 선물로 받는 방법에 대해 묻기 시작한 것입니다” (75). 다시 한 번 우리가 용서를 받고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까닭은, 우리가 쳐놓은 안전 지대 밖으로 우리가 밀려났을 때에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며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먼저 그러한 안전 지대를 벗어나시고, 우리를 먼저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용서를 베푸셨지만, 용서 받아야 할 사람이 되셔서 그 모든 저주를 또한 홀로 받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용서는 그 분을 바라보고 그 분 안에 머물 때, 즉 제자가 되어가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여정이 됩니다.

4장의 주제는 거룩함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거룩함은 구별됨과 순수함입니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예수의 거룩함이 그런 것이 아니었음을 밝혀냅니다. 예수의 거룩함은 영문 밖으로 나아가서 버림받은 자들,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가치를 회복시켜주시는 거룩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성 중 하나가 거룩함이라면 우리는 거룩함에 대해서 매우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가장 거룩하신 분이신 예수께서는 가장 깊이 참여하시고 인간의 경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십니다”(88).

5장에서 윌리엄스는 공적 신앙의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토대에 대해서 말합니다. 저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가장 신선하면서도 좀 더 구체적인 그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이었습니다. 윌리엄스는 세속화라는 이데올로기가 가진 한계는 궁극적으로 어떤 공동선을 전혀 제공하지 못하는 점이라고 지적하면서, 최근 서구 사회에서 이슬람이 저물어 가는 기독교를 대체할 새로운 종교일 수 있다는 이슬람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면서도, 여전히 이슬람이 유럽 사회에서 이슬람 왕국을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공적 신앙의 실천을 단순한 헤게모니 싸움으로 치환시키기 보다, 윌리엄스는 기독교 신앙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이 동등한 가치를 가졌다는 신념”과 “인간은 모두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신념이 공적 신앙으로서의 기독교가 정부에 대한 비판적 지지자로서의 역할을 해 나갈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합니다. 윌리엄스가 공적 신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꽤나 실천적으로 나누고 있다는 면에서 이 부분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지만, 아무리 봐도 이 정도로는 좀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이 책이 제자로서의 삶에 대한 아주 개략적인 그림을 그리는 책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런 시도 자체가 굉장히 탁월한 시도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제자도에 관한 책들은 공적 신앙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거나, 제자도와 관계 없는 것으로 여겨 버리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6장에서 윌리엄스는 기독교 영성이 무언가 황홀경에 빠지는 것이거나, 혹은 일상과 분리된 특별한 경험이라는 왜곡된 견해를 불식시키고, 기독교 영성이란 곧 성령 안에서의 삶이며, 성령 안에서의 삶의 결과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는 일에 다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령 안에서의 삶을 살아가는데 기준이 될 만한 네가지 지침을 제시합니다. 그 네가지 지침은 자기 이해, 평정, 성장, 그리고 기쁨입니다. 자기 이해는 자기 성찰입니다. 즉 자신이 느끼는 감정, 욕구, 생각 그 외의 것들에 직접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그러한 것들과 나 사이에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에 하나님께서 들어오셔서 일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하심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감정이나 욕구, 생각을 돌아보고, 그러한 것들을 향해서 역으로 질문하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윌리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잠깐 멈춰 봐. 이 감정과 본능, 정서, 열망 둘레에 공간을 좀 둘 수 있지 않을까? 그 주위에 약간 빈 자리를 두어서 그것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일을 막아낼 수 있지 않을까?… 조금 뒤로 물러나서 그 감정들 둘레에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배치하고 여러분 자신에게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하십시오. 그 문제들을 똑바로 바라보고, “자, 덤벼. 네가 정말 진짜냐? 너의 실체가 뭐냐? 라고 외치기 바랍니다” (126). 궁극적으로 이렇게 하는 까닭은 하나님만이 우리가 진짜 누구인지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자신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윌리엄스는 이렇게 매일 기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말씀해 주소서”(127). 이렇게 기도하는 일이 중요한 까닭은,  “그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이름을 불러 주시는 일에 우리의 전 존재가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127). 평정은 자기 이해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이런 공간을 만들게 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익숙해지면 질수록 우리는 평정을 되찾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안정감의 근거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렇게 계속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분께서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것을 듣는 경험을 하게 될수록 우리는 성장해 나가게 됩니다. 우리의 한계를 알게 되고, 어느 부분에서 우리가 성장해야 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과정의 끝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를 절대로 버려두지 않으시는 그 분께서 우리를 아시며, 우리가 가는 길을 인도하시며, 설사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친다고 하더라도 그 분이 매일 매일 인도하시며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은 깊은 기쁨을 마음에 담고 살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비록 감옥에 갇혀 있었으면서도 “기뻐하라”고 계속해서 말했던 것입니다.

이번 서평은 5장의 공적인 신앙에 관한 부분만 제외하면 거의 책 자체에 대한 요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까닭은, 이 책은 요약하는 것을 넘어서서 좀 더 깊은 소화가 필요하고, 깊이 소화하기 위해서는 반복되는 묵상과 삶의 실천이 필요한데, 제가 아직 그 정도 깜냥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책을 읽으면서 많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기회가 될 때마다 윌리엄스의 이 책은 제가 자주 꺼내서 읽고 묵상하는 책이 될 것 같습니다. 제자의 길이 어떤 것인지 궁금한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서평 쓰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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