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rine, Narrative, and the Identity-Formation of the Christian Disciple
교리, 내러티브,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형성

“Oneself as Another”

[Please find the English version below.]

교리, 내러티브,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형성

네번째 박사 과정 공부 나눔에서는 저의 중요한 관심사인 기독교 교리 교육을 통해서 어떻게 정체성 형성에 기여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얘기를 펼쳐가기 위해서 특별히 중요한 개념들이 두가지 있는데요. 첫번째로는 펜실베니아 대학교(the University of Pennsylvania)의 파멜라 그로스만(Pamela Grossman) 교수가 창안한 “지향”(orientation)이라는 개념, 그리고 두번째로는 해석학자인 폴 리쾨르(Paul Ricoeur)의 내러티브 정체성(narrative identity) 개념입니다. 저는 이 두 개념을 교리에 대한 저의 질문과 연결시키면서 교리를 일종의 내러티브로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걸 통해서 교리가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며,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자 합니다.

먼저 그로스만 교수의 지향 개념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그로스만 교수는 펜실베니아에서 교육학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의 지향 개념은 교사(혹은 교수)가 자신이 가르치는 과목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철학적 이해, 곧 그 과목의 지식의 본질적 성격, 그 과목의 지식 이수 및 생산이 이루어내고자 하는 목표나 인간 이해 등에 대한 대답이 그가 그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법에 그대로 반영되며, 이것은 각 교사가 얼마나 그 과목을 잘 혹은 못 가르치느냐에 깊이 영향을 끼치게 되기에, 먼저 교사들에게 각 과목의 지향에 대해서 고민하게 해야 한다고 발표한 데에서 유래했습니다. 이미 지난 시간에 얘기했듯이, 신학에도 이러한 지향 개념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말했다시피, 실천 신학은 신학의 지향(orientation)을 실천적인 지혜라고 이해하며, 그러한 틀 안에서 신학을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의 경우, 신학의 지향 뿐만 아니라, 교리의 지향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하며, 교리의 중요한 지향 중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형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그로스만의 지향 개념과 리쾨르의 내러티브 정체성(narrative identity) 개념이 저의 교리에 대한 질문을 통해서 만나게 됩니다.

일단 내러티브 정체성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리쾨르는 모든 정체성이 내러티브 정체성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살아온 삶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생성되며, 그렇게 생성된 우리의 정체성은 다시 우리 삶의 이야기들을 해석하는 틀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러티브 정체성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디에터 테이쳐트(Dieter Teichert)는 도움이 될만한 충고를 해줍니다. “리쾨르는 개인 정체성이라는 말을 실제적인 카테고리 안에서 접근합니다.” 이 말은 곧 리쾨르에게 있어서 개인과 공동체의 모든 행위들은 그 행위의 주체가 되는 이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개인과 공동체의 정체성은 “이 일을 누가 했죠?” 혹은 “이 일의 주체가 누구죠?”와 같은 질문들에 대답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리쾨르는 우리가 이런 질문들에 답할 때 우리는 누군가의 이름을 대는 식으로 답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누군가의 이름을 대고 그를 지목하는 것 이상입니다. 리쾨르의 말을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누군가를 지목할 때 그의 이름을 대는 것의 토대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누군가를 주체로 이해하고 그 혹은 그녀의 이름을 그 사람의 삶을 통해서 변하지 않는 정체성으로 이해하는데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내러티브여야만 합니다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설득력있게 얘기하듯이, “누가 그랬죠?”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누가” 그런 행위를 했는지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러한 “누군가”의 정체성은 반드시 내러티브 정체성이어야만 합니다.

(리쾨르, 다른 누군가로서의 자아(Oneself as Another))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질문은 과연 교리를 일종의 내러티브로 이해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내러티브로서의 교리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제자로서의 정체성 형성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가능성을 열게 되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일단 내러티브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리쾨르가 정의하는 내러티브에 대해서 쓸 수 있다면 좋겠지만, 리쾨르의 내러티브 개념은 철학적으로 굉장히 난해하고 길기 때문에, 대신에 리쾨르의 성경 내러티브라는 주제로 케임브리지에서 박사 논문을 쓴 또 다른 영향력 있는 학자인 케빈 밴후저의 내러티브에 대한 정의가 훨씬 더 도움이 될 듯 합니다. 밴후저는 내러티브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내러티브란 연결되어 있는 사건들을 보통 시간상의 순서를 통해서 말 혹은 글을 통해서 재연되는 것을 말합니다. 내러티브는 그것이 이야기이든 역사이든지 간에 단순히 연대기적이지는 않으며, 오히려 인물들과 사건들의 재구성입니다. 내러티브에는 플롯이라고 하는 특수한 통일성 혹은 정합성이 존재합니다. 플롯은 만약 그것이 없었다면 굉장히 어지럽고 무질서한 행동과 사건들의 다양한 조합이 되었을지도 몰랐을 것에 질서를 부여합니다. 내러티브는 이야기를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무언가가 있는데, 만약 내러티브가 명제로 바뀌게 된다면 그러한 과정 속에서 전달되고자 하는 무언가는 그 본래의 모습을 잃게 됩니다.

(케빈 밴후저, 교리의 드라마(Drama of Doctrine))

이러한 내러티브의 정의에 있어서 특이한 점은, 리쾨르가 말한대로 (그리고 밴후저가 확증한 대로) 모든 내러티브들에 “플롯화”(emplotment)라고 불리는 요소가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플롯화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면에서 마치 서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구슬들을 연결시켜서 아름다운 목걸이를 만들어내는 실 같은 것입니다. 첫번째로 플롯화는 “단순한 사건들의 연속성 속에서 재구성을 이끌어내는 작용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시간적인 사건의 나열에 불과한 연대기와는 달리 내러티브에는 연대기적 연속성을 조직하는 구조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플롯화는 주체, 목표, 교류, 환경, 예기치 못한 결과와 같이 서로 상이한 요소들을 하나로 묶어냅니다. 그러므로 연대기적 연속성을 조직하는 구조로서의 플롯화의 역할과 더불어서, 플롯화는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며, 그렇게 해서 우리는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어떻게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교리는 과연 내러티브화 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교리에 내러티브라는 낯선 옷을 입힌다는 것이 가능하느냐는 질문이라기 보다는, 교리 자체가 원래부터 내러티브라는 옷을 입고 있느냐, 만약 그렇다면 그러한 옷을 입고 있었다는 증거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느냐는 질문이라고 보아야 더 타당할 것입니다. 두번째 박사 공부 나눔에서 소개했던 카톨릭 신학자 한스 우르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는 자신의 5부작 신학의 드라마(Theo-Drama)에서 교리의 내러티브적 성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교리가 가진 이러한 드라마적이고 내러티브적인 모습은 하나님께서 당신과 피조계 사이의 투쟁 속에서 피조계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먼저 손을 내미셨고, 피조계의 의미와 구원에 대해서 무언가를 행하셨던 하나님의 역사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의 내러티브를 통해서 피조계의 정체성과 하나님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면, 교리 안에는 이미 내러티브적인 요소가 있다고 보아도 그다지 틀린 부분이 없을 것입니다. 옥스포드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는 기독교 교리가 갖춰야 할 4가지 요건으로 다음을 제시합니다.

  1. 교리는 교회 공동체의 사회적 경계선으로 작용합니다.
  2. 교리는 성경 내러티브를 통해서 만들어지며, 그러한 내러티브를 해석하는 틀이 됩니다.
  3. 교리는 경험을 해석합니다.
  4. 교리는 진리 주장을 폅니다.

일단 발타자르의 주장을 통해서 교리가 성경 내러티브를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주장은 자동적으로 충족이 됩니다. 나머지 1, 3, 4번의 경우 또한 발타자르의 주장대로 교리를 내러티브로 이해한다고 해도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는 조건들입니다. 1번의 경우, 특정 내러티브를 통해서 형성된 정체성은 당연히 그 공동체나 개인의 사회적 경계선으로 작용하게 되며, 또한 자연스럽게 그들의 경험을 해석하는 틀이 됩니다. 또한 자연적으로 그러한 해석의 틀은 그러한 개인과 공동체가 진리를 주장하는 틀이 됩니다. 다만, 여기서 진리라는 말의 의미가 어떤 것이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일단 교리를 내러티브로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어 보이며, 따라서 교리를 통해서 그리스도인 제자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도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만 얘기하면 “그래서 뭐?”라는 질문을 저절로 하게 됩니다. 마지막 시간인 다음 공부 나눔에서는 이런 주장들이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 함의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LIKEELLUL

“Oneself as Another”

Doctrine, Narrative, and the Identity-Formation of the Christian Disciple

In the fourth sharing of my doctoral studies, I will discuss how teaching and learning doctrine could be of service for the Christian identity formation.  There are two important notions in unfolding my arguments here.  The first one is what Pamela Grossman of the University of Pennsylvania calls “orientation,” and the second is Paul Ricoeur’s notion of narrative identity.  By connecting these two notions with my questions on the possibility of teaching and learning doctrine, I will argue that it is possible to conceptualize doctrine as a sort of narrative, but also doctrine understood as such could be affecting the Christian’s identity formation deeply.

Now, let us take a close look at Grossmna’s notion of orientation.  Teaching education at the University of Pennsylvania, Grossman coined the term by doing research o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eacher’s performance and her philosophical assumptions, represented as the answers to such questions as the nature of knowledge in that field, and the goals of learning or producing knowledge in the field.  What Grossman discovered was that there was an important relationship between such philosophical assumptions and the teaching performance.  As I discussed already, this notion of orientation could be applied to theology.  In the case of practical theology, the orientation is practical wisdom, in which theology ought to be taught and learned. In my research, I would like to study the orientation of doctrine, and one of the important orientations of doctrine is the identity formation of the Christian disciple.  This is also the connecting point between Grossman’s orientation and Ricoeur’s narrative identity, the meeting point of which is my question on teaching and learning doctrine.

To begin with, Ricoeur argues that all identities are narrative identities.  That is, our identity is formed through our life stories, which in turn become a kind of interpretive framework for understanding our life stories.  In understanding Ricoeur’s narrative identity, Dieter Teichert provides helpful advice, “Dieter Teichert provides a helpful advice for understanding Ricoeur’s notion of narrative identity, “Ricoeur discusses personal identity as a practical category.”  What this means is that for Ricoeur the narrativity of identity has everything to do with the individual and communal actions which are ascribed to us as agents.  In other words, for Ricoeur, to discuss the identity of a person or a community is to answer such questions as, “Who did this?” or “Who is the agent, author?”  Ricoeur goes on to say that we usually answer these questions by naming someone, yet what Ricoeur is asking goes much deeper than merely naming people’s names.

But what is the basis for the permanence of this proper name?  What justifies our taking the subject of an action, so designated by his, her, or its proper name, as the same throughout a life that stretches from birth to death?  The answer has to be narrative (italics mine).  To answer the question “Who?” as Hannah Arendt has so forcefully put it, is to tell the story of a life.  The story told tells about the action of the “who.”  And the identity of this “who” therefore itself must be a narrative identity.

(Ricoeur, Oneself as Another)

Now, the remaining question for us is whether doctrine could be understood as narrative.  If we answer to this question, we would be able to conclude that doctrine could be of service for identity formation for the Christian disciple.  But first, we need to look into what constitutes narrative.  While it might be best to draw upon Ricoeur’s definition of narrative, his understanding of narrative is too abstruse and philosophically sophisticated, so we might as well draw upon Kevin Vanhoozer’s, whose doctoral dissertation was on Ricoeur’s biblical narrative.  Vanhoozer defines narrative as follows:

A narrative is a spoken or written recital of connected events, usually given in the order in which they occurred.  Narratives—stories and histories alike—are not just chronologies but configurations of characters and events.  A narrative has a particular kind of unity or coherence thanks to its plot; it is the plot that brings order to what would otherwise be a confused and arbitrary diversity of actions and incidents…  Narratives make story-shaped points that cannot always be paraphrased in propositional statements without losing something in translation (Kevin Vanhoozer, Drama of Doctrine)

What is peculiar about this definition of narrative is, as Ricoeur says (and Vanhoozer affirms), that all narratives come with what both call “emplotment.”  Emplotment is like a thread weaving together many disparate beads to form a beautiful necklace, in the following two respects.  First, emplotment “is the operation that draws a configuration out of a simple succession.”  In other words, unlike chronology, which could be nothing but a simple succession of events, narrative has a structure for organizing chronological successions.  Second, “emplotment brings together factors as heterogeneous as agents, goals, means, interactions, circumstances, unexpected results.”  Thus, in addition to its having a structure for organizing chronological succession, emplotment provides meaning for each of what constitutes a narrative, so that narrative could be made sense out of such diverse elements as listed above.

In light of this understanding of narrative, could doctrine be narrativized?  There are two considerations in answering this question.  First, this is not so much a question of reconfiguring doctrine into something with a new shape that was previously external to doctrine; rather, it is a question of whether doctrine is intrinsically narrativisitc.  Second, the sources of doctrinal reflections, namely, Scripture, historical tradition, and our lived experiences, all come in narrative shape.  According to von Balthasar, such narrative (drama) shape of theology and doctrine is reveled in “the history of God’s initiative on God’s part for God’s world, the history of a struggle between God and the creature over the latter’s meaning and salvation.”  Thus, it seems relatively safe to say that doctrine could be narrativized.  However, in going deeper, Alister McGrath points out four conditions which any adequate account of Christian doctrine needs to fulfill.

Doctrine functions as a social demarcator (social boundary-marker)

  1. Doctrine is generated by and then interprets the Christian narrative
  2. Doctrine interprets experience
  3. Doctrine makes truth claims.

Now, if doctrine is narrativized in the way I have construed it so far, could it fulfill all four conditions?  In other words, could doctrine be narrativized and still remain doctrine?  First off, through von Balthasar’s claim here, the second condition is automatically fulfilled.  The remaining three conditions are also true of von Balthasar’s claim of doctrine as narrativistic drama, for doctrine as narrative functions as the demarcator of the Christian community, which in turn becomes the interpretive framework for understanding the Christian experiences.  In addition, this interpretive framework becomes the criteria by which the Christian disciple and community makes truth-claims, except that the meaning of truth here could be dependent upon who makes such claims.  At any rate, it makes sense to say that doctrine is narrative; at the same time, doctrine as narrative will be able to contribute to the identity formation of the Christian disciple.  If I stop here, then the question which arises is “so what?”  Therefore, in the last sharing of my doctoral studies, I will discuss what implications this has for my research as well as for the life of the Christian disciple.

Oneself as An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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