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영성

정체성과 일, 우상 사이의 뗄래야 없는 관계에 복음으로 쐐기를 박다- 켈러의 일과 영성

일과 영성의 원제는  Every Good Endeavor: Connecting Your Work to God’s Work 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어쩌면 당연히) 영어 원제가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한국어 제목보다 더 잘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켈러는 이 책에서 일 자체가 하나님의 인간을 위한 피조물이며, 따라서 일은 그 자체로 선한 것일 뿐만 아니라 (흔히 일을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저주와 연결시키는 것과는 달리), 더 나아가서 인간이 행복하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임을 역설합니다. 하지만 일의 선함과 필요성을 긍정하는 것만으로는 일을 둘러싼 현대인들의 모든 질문과 고민, 그리고 좌절을 모두 다 담아낼 수 없지요. 그런 질문과 고민, 좌절에 대답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켈러는 흥미롭게도 굉장히 전통적인 신학적 프레임인 창조-타락-구속을 가지고 책 전체의 논지를 전개합니다. 책이 전체 3부로 구성되어 있는 까닭은 일의 본래적 창조 목적-일의 타락을 통해서 나타나는 현상들-일의 구속을 통한 소망이라는, 일의 “창조-타락-구속”에 대해서 다루기 위함입니다. 일에 관해서 성경과 복음이 말하는 메세지를 설득력 있게 담아내기 위해서 창조-타락-구속이라는 프레임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타락-구속이라는 프레임이 지나치게 신학적일 수 있고, 따라서 사람들이 일터에서 피부로 느끼는 문제들과는 거리가 멀다고 보일 수 있다는 우려에서인지, 켈러는 창조-타락-구속이라는 세가지 요소들을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쉽게 던질만한 질문으로 바꿔서 표현합니다. 1부에서 켈러가 묻는 질문은 “왜 우리는 일하고 싶어하는가?” 이며, 2부에서는 “일한다는 것은 왜 그다지도 어려운가?”이고, 마지막으로 3부에서는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우리의 일터에서 어떻게 진정한 만족을 발견할 수 있는가?”입니다. 창조-타락-구속의 프레임이 신앙인들에게는 익숙할 수 있지만, 비신앙인들에게는 별로 와닿지 않을 수 있으며, 신앙인들과 비신앙인들 모두에게 지나치게 철학적이고 명제적인 이야기로만 들릴 수 있다는 우려를 인식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신학적 언어를 일상적 질문으로 바꿔 표현함으로써 생활인들과 소통하려는 시도는 일단은 성공적인 듯 보입니다. 물론 그러한 성공이 켈러의 주 사역 무대인 맨하탄에서 일하는 젊은 전문직 종사자들에 한정된 것일 수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어 보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각설하고, 1부에서 켈러는 일이라는 피조물 자체는 1) 삶의 의미 추구라는 측면에서, 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의 선한 표현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3) 다른 이들을 섬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수단이라는 측면에서 궁극적으로 선한 것임을 인정합니다. 이런 일 자체의 선함에 대한 인정이 현대 문화의 노동관에 가지는 논리적 함의는 크게 두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로 모든 일은 선한 것이기 때문에, 재정적 보상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일의 귀천을 나누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 됩니다. 여기서 켈러는 뉴욕 맨하탄의 재정적 보상에 기준을 둔 계급적 노동관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켈러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표현이 mlkh라는 히브리어임을 언급하면서 (20), 이 동사가 그 당시에 육체 노동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즉 하나님의 일하심이 뉴욕 맨하탄의 고임금 노동자들이 우습게 보는 육체 노동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목수이셨음을 환기시키는 것 또한 이런 차원에서 재정적 보상으로 귀한 일과 천한 일을 나누는 계급적 노동관을 비판하기 위함입니다. 이 부분에서 켈러는 맨하탄의 중산층 이상 가정의 자녀 교육이 자녀가 정말 관심을 보이고 흥미를 가지는 것보다는, 세상적 출세와 재정적 보상에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 또한 에둘러서 비판합니다. 교육이 고소득 직업군으로 들어가는 수단으로 전락한 현실에 대한 일종의 문화 비평입니다.  두번째로, 켈러는 (루터를 인용해서) 우리의 일이 젖소를 짜는 일꾼의 손가락을 통해서 사람들을 섬기시는 “하나님의 손가락”이 된다고 주장하면서(58), 성스러운 일과 세속적인 일이 있다는 이원론적 노동관 또한 비판합니다. 루터가 살던 시대는 성스러운 일에 종사하는 것이 구원에 더 용이하다는 생각, 즉 수도사나 목회자가 되는 것만으로 하나님 앞에서 세속적인 일에 종사하는 이들보다 더 인정 받을 수 있다는 노동관이 횡행하던 시대였고, 켈러는 현대 문화 안에도 은연 중에 성스러운 일과 세속적인 일을 나누는 경향이 있음을 예리하게 감지해 냅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켈러에게는 칭의 교리, 즉 우리의 하나님 앞에서의 인정 받음이 우리의 일에 달려있지 않다는 교리가 이런 이원론적 노동관을 비판하는 중요한 잣대가 됩니다. 모든 일은 선하고 거룩한 것이며,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을 바라보는 마음과 동기가 복음 메세지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지, 우리가 하는 일 그 자체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더 인정을 받는 것도, 덜 받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일의 소명이 하나님의 일하심과 함께 문화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협력자라는 정체성을 향해 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1부를 마칩니다.

2부에서 켈러가 답하고자 하는 질문은 이미 말씀드린대로 “일한다는 것은 왜 그다지도 어려운가?”입니다. 그리고 2부를 읽어내는데 핵심이 되는 개념은 우상입니다. (사실 우상은 책 전체를 읽어내는데 핵심이 되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켈러는 우상을 “궁극적인 것으로 바뀌어 버린 선한 것”으로 정의합니다. 즉 우리의 일하는 자로서의 본래적 소명이 1부에서 켈러가 언급한대로 하나님과의 협력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대리하여 문화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것이었다면, 타락 이후 일은 더 이상 그런 역할을 제대로 감당해내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일은 우리의 우상이 되기도 하며 (즉 우리가 인생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그 자체가 되기도 하며) 다른 우상들, 즉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이 되는 무언가(그게 권력이든, 성취든, 돈이든, 명예든, 무엇이든지 간에)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2부의 핵심이 되는 장은 8장이며, 켈러는 8장에서부터 우상에 대한 얘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9장에서 사람의 정체성과 그 사람의 삶의 이야기 사이의 밀접한 관계에 초점을 맞추면서 우리의 일을 통해서 드러나는 우리의 우상이 어떻게 우리의 정체성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지는 우리의 삶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켈러가 사용하는 자료들은 신학이나 기독교에 기반한 자료들이 아니며, 일반 철학자인 알라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를 비롯한 내러티브와 정체성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철학입니다. 일상 언어를 통한 설득을 위해서 켈러가 얼마나 노력을 하는지를 엿볼 수 있는 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울러서, 8장과 9장은 비록 2부 마지막 장과 3부 첫 장이라는 경계로 나뉘어져 있기는 하지만, 같이 연결해서 읽으면 켈러가 이 책에서 하고자 하는 얘기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게 해주는 장들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면서 일은 다른 피조물들과 함께 타락했고, 그 타락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대체하는 대체물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우상들이며,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서 우리의 우상들을 더욱 우리 삶의 이야기로 초대하며, 그 우상들의 영향력이 더욱 강해지도록 하며 (즉 우리의 정체성을 좌지우지하게 만들며), 그 때문에 찾아오게 되는 모든 절망과 좌절들을 스스로 자초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지만 더 크게는 세상의 타락이라는 맥락에서) 우리는 아무리 일해도 우리 일의 열매를 쉽게 맛보기가 어려워지며 (즉 일 자체를 통해서 얻는 성취나 만족에는 항상 공허함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일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리며 (혹은 끝없이 우리를 쳇바퀴 안에 가두어 버리며), 또한 그 결과 일은 우리 자신의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써의 이기적인 추구가 되어버리며, 이 모든 것들의 끝에는 우리의 우상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켈러는 3부에서 자연스럽게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우리의 일터에서 어떻게 진정한 만족을 발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으며, 또 해야 할 당위성을 부여받습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복음은 우리가 타락한 일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동기와 수단, 그리고 그를 통한 본래적 만족을 모두 제공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일에 달려 있지 않고, 일을 통해서 우리가 추구하는 우상에 달려 있지도 않다는 사실이 복음을 통해서 폭로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누구인지 아시며 (정체성), 우리의 일이 더 이상 우리가 누구인지를 결정지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일은 이제 원래대로 피조물의 위치로 돌아가서 이웃과 사회를 섬기는 수단으로써만 작용하게 되면, 그제서야 일은 우리에게 그냥 일일 뿐, 우리는 워커홀릭(workaholic)이 될 필요도 없으며, 일을 저주의 결과로 치부하지도 않게 됩니다. 특별히 여기서 켈러가 자신의 논의 저변부에 깔고 있는 흐름을 제대로 보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은 바로 켈러가 이런 논의를 세속 문화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표현과 자기 욕구 실현에 치중하게 만들면서, 공공선 실현의 가능성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음을 인지하면서 이런 논의를 펼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의를 펼치는데 중요한 배경 지식을 제공하는 인물은 버클리대(UC Berkeley)의 사회 학자인 로버트 벨라(Robert Bellah)이며, 특히 그의 책 “마음의 습관(Habits of the Heart)”입니다. 벨라는 이 책에서 현대 사회가 다들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며, 자기 표현에 몰입하는 사람들로 채워지게 되면서, 공공선과 이웃을 위한 희생이라는 덕목을 펼칠 수 있는 사회 구성원을 키워내기 어려운 환경으로 바뀌어가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벨라가 말하는 것이 바로 직업 소명론의 회복입니다. 즉, 우리가 하는 일과 우리가 종사하는 직업에 대한 관점이 이웃과 사회를 섬기며, 이웃과 사회를 위해서 희생하는 측면을 강조하게 해줄 수 있어야, 즉 일을 소명의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공공선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켈러에게 있어서 일과 직업을 소명론으로 파악하는 것은, 단순히 신자 개인이 자신의 직업 현장에서 겪는 문제들을 신앙으로 해결하고, 좀 더 보람있는, 의미있는 삶을 살게 해주는 차원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왜냐하면 켈러는 직업 소명론의 회복이 교회의 공적 신앙의 핵심적 표현일 뿐 아니라, 교회가 사회를 섬기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수단이 된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독자 여러분들 중에는 동의하시는 분도 계실 것이고, 동의하지 않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또한 그것 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씀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켈러가 바라보는 소명으로써의 일의 회복에 대해서 현대 교회가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명제가 점점 더 자명해지고 있음에도, 교회들 중에 일의 회복에 관심을 가지는 교회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누군가는 켈러의 일과 영성에 담긴 직업 소명론이 부르주아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물론 그런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좀 더 넓은 차원에서 필요하며, 좀 더 공교회적인 차원에서, 교단 차원에서, 개신교와 카톨릭 전체라는 차원에서 좀 더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켈러는 비록 이 책에서 자신이 가진 약점을 이미 언급한대로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직업 소명론과 공적 신앙 사이의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복음 메세지를 통해서 표현해내려고 하는 시도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면들을 고려하면서 이 책을 읽으신다면 충분히 좋은 생각할 거리들을 얻게 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책은 추천할 만한 책입니다. 읽을 만한 책입니다. 더 많은 질문과 고민, 씨름이 이 책 이후에도 따라오기를 바래 봅니다.

서평 쓰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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