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 가는 길

복음에 기반한 자비 사역이란? – 켈러의 여리고 가는 (Ministries of Mercy)

교회 안의 문화가 복음을 바라보는 태도는 종종 매우 피상적입니다. 교회 문화는 복음을 그저 처음 믿는 사람들이 회심을 위해서 들어야만 하는 메세지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팀 켈러는 그의 당신을 위한 갈라디아서 서문을 비롯한 자신의 여러 다른 저서들에서,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ABC가 아니라, A부터 Z까지 모두를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기존의 교회가 복음에 대한 지속적이고도 철저한 묵상을 게을리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켈러가 가진 신념의 핵심이란, 결국 복음에 대한 지속적이고도 철저한 묵상이 내 정체성을 바꾸고, 내 관계 맺는 방식을 바꾸고,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꾸고,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꾸고, 마침내 내 삶의 지향점을 바꾸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특히나 그가 2017년까지 사역했던 리디머 교회의 캐치 프레이즈인 은혜가 모든 것을 바꿉니다 (Grace changes everything)는 값없이 주어진, 그 누구도 노력해서는 얻어낼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grace as free, unmerited favor of God)가 가진 폭발적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고자 하는 의도를 엿볼 수 있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는 교회의 정체성, 교회가 맺는 관계와 그를 통해서 하는 모든 일, 신앙인들의 정체성, 그들이 맺는 관계와 그를 통해서 하는 모든 일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신앙인들과 많은 교회 공동체는 은혜가 우리의 삶의 어떤 부분을 어떻게 바꾸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죠.) 예를 들자면, 우리의 정체성이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반하고 있을 때, 우리는 우리가 노력해서 이룬 성공 때문에 지나치게 우쭐하거나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게 되고, 반대로 우리의 실패 때문에 지나치게 좌절하거나 찌그러들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체성의 근간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우리가 이루어낸 성공이나, 우리가 맞닥뜨린 실패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공해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지나치게 높이고, 나르시즘(narcissism)적인 자기애에 빠지게 되는 대신, “무익한 종이라”(눅 17:10)고 부를 수 있고, 우리가 아무리 실패해도, 우리는 자살을 단행하거나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이 얼마나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메세지인지요!

켈러는 교회의 자비 사역에도 복음의 은혜는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근본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이웃에 대한 사랑의 표현 또한 복음에 대한 지속적이고도 철저한 묵상에서만 나올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서평할 켈러의 여리고로 가는 의 요지입니다. 켈러의 웨스트 민스터 신학교 목회학 박사(D.Min) 논문을 개정해서 낸 이 책은, 누가복음 10:25-37의 사마리아인의 비유 안에 담겨 있는 복음의 은혜 메세지에 대한 해설이기도 하고, 따라서 이웃을 사랑하는 일인 자비 사역과 사회 정의 사역에까지도 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필수적인가를 역설하는 책입니다. 책은 2부로 이루어져 있고, 1부에서는 누가복음 10장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이웃에게 베풀어야 하는 자비의 본질, 필요성, 성격, 범위, 동기 등을 살펴보고, 2부에서는 좀 더 실제적으로 교회에서 공동체 차원에서 자비 사역을 어떻게 해내야 할지에 대해서 다룹니다. 특히 이 서평에서는 켈러가 다루는 복음에 대한 묵상과 자비 사역의 관계를 질의 형식으로 적어보고, 책 자체가 가진 장.단점에 대해서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과 신앙 공동체인 교회는 자비 사역에 참여해야 하나요?

우선 자비 사역을 정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비 사역이란, 다른 이들이 “체감하는” 필요를 채워주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체감하는” 필요가 중요한데, 왜냐하면 사람들은 결국 자신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물론 불법적인 필요는 제외될 것이고, 합법적인 물질적, 정서적, 관계적 필요를 채워주는 것을 말합니다.) 자비 사역의 본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채워진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이웃들에게 흘러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비 사역의 목적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켈러는 특히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힘없는 자와 소외된 자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이 구원의 잣대가 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자비 사역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서 추가적이거나 부수적인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핵심을 구성한다고 설득력있게 주장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자비 사역은 그리스도인의 표지이며, 바꿔 말하면 구원을 받는 믿음의 표지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는 상당히 차이를 보이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자비 사역은 누구에게 어떻게 베풀어야 하는 건가요?

누가복음 10장 본문에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과 전통적으로 원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던 유대인을 위해서 흔치 않은 희생을 합니다.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눅 10:33-35)

이 사마리아인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자비 사역은 우리가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베푸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자비 사역을 베푸는 사람들이 그러한 자비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 베푸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 나름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저 사람은 너무 게을러서 가난해진거야. 저런 사람은 도와줘봐야 소용없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켈러는 미국의 중산층들(그들이 켈러가 이 책의 독자층으로 상정한 사람들입니다)이 자신들보다 가난하거나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내뱉는 그런 판단이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하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거기에는 가난한 자들이나 소외된 자들을 향한 우리의 자기 의로움이 들어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켈러가 철저하게 기준으로 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를 대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받을 만하다고 여기셔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그렇게 받았다면, 우리들 또한 이웃들을 향해서 자기 의로움을 가지고 판단하고 정죄하기 전에 그들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풀 수 있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켈러는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와 너비를 나와 우리가 깨닫고 있는 만큼, 바로 그 만큼만 우리는 자비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깨닫게 되면 될수록 우리 안에 있는 자기 의로움이 사라지게 되고, 우리의 무가치함을 깨닫게 되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받아주시고 사랑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관계의 선순환 속에 들어간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자기 의로움이 없이 이웃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깨달아야 할 점은 또한 이 성경 말씀에도 나와 있습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 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고전 4:7)

하나님의 은혜의 체험은 점점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가진 것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노력도, 우리의 성공도, 우리의 모든 업적이나 성취도, 그 분의 허락하심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도와야 할 사람들에는 기준이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우리가 도울 능력이 되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다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면 과연 우리는 어디까지 도움을 베풀어야 하나 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지로 만들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성경에는 부자가 되는 것 자체에 대한 정죄가 전혀 담겨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디모데 전서 6장은 이렇게 명령합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딤전 6:17-18)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 사역을 요구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 가난하게, 찌질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 전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넉넉하게 베풀 수 있는 마음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켈러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계속해서 강조하며, 행위 자체가 헌신이나 희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자유로움이 있지, 강요가 있지 않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더 베풀어야 한다고 강요할 수 없습니다. 각자가 양심에 따라서, 은사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합당하게, 마음의 넉넉함을 가지고 베풀어야 합니다.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억지로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내가 베풀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인가에 있어서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푸는 것이 우리에게 부담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 아들을 희생하시는 큰 부담을 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짐을 지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고, 받은 것이 있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러한 짐을 나누어 진다는 것이 어느 정도의 부담인지는 오직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어주는 우리 자신만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마지노선은 내가 가진 것들을 너무나 많이 베푼 나머지 가족들과 친족들에게 짐이 되어 버리게 되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딤전 5:8) 고 성경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할 정도는 반드시 유지하면서 도움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준은 사람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모두 다릅니다. 특별히 가족이 있는 사람들의 경우, 자녀들 또한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작정 가진 것들을 베푸는 것이 자녀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배우자와 자녀, 부모님은 누구보다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중요한 이웃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족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사람들을 도울 때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은 자비가 자비를 제한하게 하는 것(Let mercy limit mercy)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가 죄를 짓는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우리를 무한정 용서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대로 죄를 지을 수 있는 권리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돕는 이들이 우리의 도움 때문에 더욱 더 방종하게 되고, 악한 생활 방식을 더 이어 나갈 수 있게 된다면, 그 때가 바로 자비 사역을 멈춰야 할 때라고 켈러는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그들을 돕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책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이 책에는 여러가지 장점이 있습니다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장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복음의 은혜가 우리의 자비 사역에 철저하게 모델이 된다는 원리가 실제적으로 어떻게 자비 사역에 참여하는 우리의 동기와 태도, 우리가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의 범위, 또 교회 공동체가 자비 사역에 참여하는 방식을 이끄는지를 잘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성육신 하심이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게 되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 장점이 있다면, 기존의 복음 전도 사역과 자비 사역이 구분되어 있거나 독립적인 사역이 아니라, 둘 다 모두 하나님의 이웃을 향한 사랑의 표현으로 나타나야 하며, 따라서 두 사역은 긴밀하게 통합되어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말로만 전해지지 않습니다. 행함으로써 전해집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사랑인지 말로 전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이 두 사역을 모두 잘 감당하는 교회가 많지는 않다는 것을 켈러는 인정하면서도, 두 사역 사이의 유기적 연결고리가 모두 복음 메세지에서 나오며, 복음 메세지를 지속적으로 끈질기게 묵상하고 삶에 적용하는 교회와 신앙인들은 결국 두 사역 중에 어느 쪽이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는 점을 켈러는 역설하고 있습니다.

책의 단점은 무엇인가요?

이 책의 단점이나 아쉬운 점은 딱히 짚어내기 어렵습니다만, 굳이 아쉬운 점을 꼽자면 좀 더 적극적인 사회 정의에 대해서 교회가 참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켈러가 그다지 비중 있게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켈러는 죄의 양상이 개인적, 관계적,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에서 모두 나타나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죄의 모든 양상을 포괄적으로 다루시고 치유하시기 때문에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면을 다루어야 한다고 언급은 합니다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언급하지 않습니다. 결국 켈러가 말하는 자비 사역이란 사람들의 필요에 대한 채움이 될지는 몰라도, 좀 더 적극적으로 구조를 뜯어 고치고, 개혁에 나서는 것까지 나가는 데에는 아쉬움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켈러는 구조적인 차원에서의 개혁을 언급하기는 합니다. 영어 원본 179쪽 이하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그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서평 쓰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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