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joicing in Lament
비탄함 속에서 즐거워하기

“Rejoicing in Lament”

[Please find the English version below.]

토드 빌링스(Todd Billings)의 비탄함 속에서 즐거워하기(Rejoicing in Lament)는 신학자이자 불치암 환자의 개인적인 신앙의 여정을 담은 묵상 기록인 동시에, 신학적 성찰이 현실을 마주하는데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서평자인 제가 파악하기에 특별히 다음의 세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번째, 저자의 깊은 신학적 성찰이 불치암 환자로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야 하는 현실과 맞물려서, 신학적 성찰의 실체화(Incarnation)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굉장히 고차원적인 신학적 성찰이 어떻게 우리의 삶과 생각, 습관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고, 또 끼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면에서 교리와 삶의 관계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저에게 매우 고무적인 부분이었습니다.

두번째로, 이런 신학적 성찰의 삶에서의 실체화(Incarnation)는 지혜와 신학적 성찰의 깊은 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이전의 서평에서 팀 켈러가 말했듯이, 지혜란 복잡다단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공간이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머리로는 조화가 불가능한 현실 앞에서 우리의 무능함을 인정하게 되는 동시에, 그러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 지혜인데, 깊은 신학적 성찰이 이런 면에서 우리를 지혜롭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을 빌링스의 책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환자로서 마치 사회과학의 방법론인 참여적 관찰(participant observation: 연구자가 연구하고자 하는 집단 내부에 들어가서 직접 관찰하거나 집단의 성원들과 상호 작용하면서 연구를 하는 사회 과학 연구 방법 중의 하나)을 하고 있는 듯이 사람들이 고난과 고통 앞에서 보이는 반응이나 생각에 대해서 예리하게 관찰하고, 그 관찰을 토대로 그들의 (그리고 자신의) 신학적 사고를 파헤치고 그것을 자신의 신학적 성찰의 재료로 삼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참여적 관찰의 장점은 이미 서평자인 제가 속한 분야인 실천 신학 분야에서 참여적 관찰을 통해서 교회나 신앙 공동체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조사하는데 쓰이고 있듯이, 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서평에서는, 저자가 2012년 9월, 웨스턴 신학교(Western Theological Seminary)의 교수로서 즐겁게 가르치고 학문하던 때에 불치 단계의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그 이후부터 어떻게 현실에 대한 자신의 예리한 관찰을 깊은 신학적 성찰과 연결시키면서 삶과 현실을 마주하고, 첫번째로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지혜로 인도함을 받고 있는지, 또 어떻게 독자들을 그 자신이 발견한 지혜로 인도하는지에 대해서 각각 한 꼭지씩 두 꼭지로 다루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비탄함 속에서 하나님을 비난하는 경건

저자는 서른 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불치암 진단을 받은 이후 여느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법한 질문들을 하나님 앞에 시작합니다. “하나님, 왜 나입니까?” 더군다나 저자가 진단받은 암은 일반적으로 60대 중 후반 이후의 사람들이 잘 걸리는 암이고, 저자처럼 젊은 나이에, 그것도 말기 진단을 받는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특별히 유전적으로나 환경적인 측면에서 별로 잘못된 것이 없는 상황에서 이런 암에 걸리게 된다면 누구나, 더군다나 신앙인이라는 그런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 저자는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 하나님께 책임을 묻는 것이 진정한 경건이라는, 듣기에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합니다.

하지만 저자의 이런 주장에는 꽤 합당한 두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첫번째로, 저자는 제가 C.G. 융의 욥기 서평에서 다루었듯이, 하나님에게 고통과 고난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고난과 고통이 하나님이 어찌 하실 수 없는, 소위 선을 대표하시는 하나님과 악을 대표하는 사단 사이의 전쟁 속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모두 다 하나님의 지배하심 아래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욥도 하나님께 책임을 계속해서 묻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을 허락했느냐고. 욥기 후반부에서 하나님께 책임을 묻고 이유를 듣고자 했던 욥의 신앙이, 고난과 고통에 대한 아무런 질문이나 반항, 하나님을 향한 비난도 없이 그저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이기에 고난과 고통을 당한 것을 하나님의 욥을 향한, 특별히 욥이 무언가 잘못한 일에 대한 심판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욥의 세 친구들보다 더 경건한 것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고난과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와 관련해서 저자는, 특별히 제가 느끼기에 고난과 고통에 관련해서 한국의 기독교인들 사이에 만연한 태도 한가지 사례를 예를 듭니다.

저의 목회자 친구가 아이를 유산한 커플과 대화 중이었습니다. 남편은 울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런 감정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말만 뿐이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런 무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남편은 아마도 자신이 굉장히 신앙적이 되고 있다고 느끼는 싶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왕이심을 제대로 고백했지만, 자신의 비탄함과 고통을 표현하는 법을 몰랐습니다. (85)

이런 사람들은 서평자인 저 또한 본 적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경건함보다 더 경건해지려는 사람들, 자신들에게 고난과 고통이 닥쳤을 때, 자신들 안에 저절로 올라오는 비탄함과 하나님을 향한 비난의 마음(그렇습니다! 저자는 단순히 하나님께 책임을 묻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정확히 blaming God, 심지어 complaining to God이라는 문구를 쓰면서 말이죠.) 을 무조건적으로 억누르고, 웃는 얼굴로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니 감사한다고 말하는 것이 신앙적인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욥은, 그리고 저자는 완전히 다른 말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저자의 두번째 근거입니다. 저자는 시편에서 탄식하는 시편의 저자들이 하나님께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과 고난의 책임을 묻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통과 고난 속에서 탄식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비난하고, 하나님께 책임을 묻고, 하나님께 대답 좀 해보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기저부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은 언약 관계,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분이 아니시고, 우리에게 정의를 베푸시는 분이신데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닥친 건지 알고 싶다고, 뜻을 알려달라고 부르짖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와 믿음의 관계가 바탕이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아울러서, 탄식의 시편들은 종종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비난과 그 분을 향한 신뢰를 함께 보여줍니다.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   시편 42:9  (63)

이 시편 저자의 말이 고어로 쓰여져 잘 와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적인 언어로 바꾸면 “당신이 저의 반석이시라면서 왜 이런 때는 가만히 계십니까? 내가 이렇게 힘든데 도대체 뭐하시는 겁니까?” 정도가 될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 교회에, 또 미국과 전 세계의 한인 이민 교회에 저런 식의 신앙을 가진, 하나님 앞에서는 무조건적으로 웃어야 하며, 감사드린다고 말해야 하며, 모든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경건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신앙인들이 많다는 것은 결국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고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되기에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심정에 공감하는 동시에 안타까웠습니다. 요약하면, 고통과 고난 앞에서 우리의 모든 감정을 숨김이 없이 드러내고 아파하는 것은 전혀 불경건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 어떤 식으로든지 답을 (꼭 합리적인 설명이 아니라고 해도) 듣게 된다는 것이며, 그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라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저자가 불치암에 걸린 가운데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깨닫게 된 현실이며, 그가 얻게 된, 그리고 우리가 얻어가야 할 지혜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완벽한 치유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불신앙

저자는 입원해 있으면서 당연히 많은 사람들의 방문을 받게 되었고, 그들이 저자를 위해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를 듣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드리는 기도 속에서 한가지 공통점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많은 이들이 저자에게 “완벽한 치유가 속히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를 저자를 위해서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함께 모여서 한 명이 대표로 하는 대표 기도에서도 나타났고, 또한 불치암에 걸린 저자를 위해서 인터넷에, 혹은 이메일로 올려진 기도문에서도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완벽한, 속히 임하는 치유”를 바라는 기도가 가진 불신앙적인 요소에 대한 두가지 근거를 제시합니다.

첫번째로, 이런 식의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고통에 참예하라는 성경의 명령을 (질병을 통해서도 그리스도의 고난과 고통에 참예할 수 있습니다!) 도외시한 채,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만이 우리에게 임한 현실이라는, 왜곡된 현실 인식에 기초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이런 성향은 특별히 보수적인 복음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흔히 드러납니다. 승리주의(triumphalism)라고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는 거리가 먼 신앙이죠.) 즉,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고난과 고통이란 이미 임한 승리를 위해서 지나쳐야 할 과도기적인 것일 뿐, 우리에게는 곧 승리(치유)가 빠르게 주어질 것이라는, 전혀 신앙적이지 않은 기대와 함께, 하나님은 믿는 자들에게 믿는 자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승리를 주시는 분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이해,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현실에 대한 왜곡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아울러서, 만약 그러한 기도를 드렸는데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 하나님은 (애초에 그런 약속을 하신 적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짓말 쟁이가 되어버리고, 원하는 완벽한 치유를 빠르게 얻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게 됩니다. 저자는 비탄함이라는 감정과 그에 따르는 기도, 특히 고난과 고통 앞에서 충분히 비탄해하고 아파할 때만이 하나님에 대해서, 현실에 대해서 올바르게 인식하게 되며, 그렇게 할 때에야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말하는 진정으로 “기뻐하는” 삶을 살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완벽한 치유를 바라는 기도는, 우리의 몸이라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리 자신의 일부를 무시합니다. 저자는 특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기도를 드릴 때 가지고 있는 신학적 전제에 대해서 비판합니다.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은 치유를 위한 기도가 우리가 원하는 시간대에 맞춰서 일어나야 한다고 가정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가져다 주시는 치유는 곧바로 일어나야 하며, 우리가 인간적인 방식으로는 생각할 없는 깜짝 놀랄 만한 기적적인경험이어야 한다고 가정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유하시는 과정은 종종 이런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우리의 거쳐야 치유의 과정을 아주 천천히 거치면서 일어납니다 (114).

저자가 걸린 암이 불치병이라는 진단에 비추어 볼 때, 또 완전히 낫게 된다고 해도 다시 재발할 확률이 80% 이상이라는 의사의 진단에 비추어 볼 때, “완벽한 치유가 빠르게” 나타나도록 해달라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즉 좀 더 평범한 방식으로 (하지만 전적으로 합당한 방식으로) 치유를 일어나게 하실 (혹은 일어나지 않게 하실) 가능성을 미리부터 차단해 버립니다. 하지만, 평범한 것, 일상적인 것, 우리 몸이 치유되는 일반적인 과정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방식은 아닐거라는 가정은 그 자체로 이미 첫번째에 얘기했던 승리주의적인 생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통과 고난에 대해서 아파하고 비탄해하는 과정을 생략해 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거기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몸이 있다는 사실, 우리의 고통과 고난이 무엇이든지간에 우리의 몸과 깊은 관련이 있고, 고통과 고난에서 회복되고 치유되는 과정도 역시 몸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은 그러한 과정을 생략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왜 여전히 그 몸에 십자가형의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십자가 형을 당하신 그 예수이심을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표지로서뿐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가지고 계신 몸이 우리가 기대하듯이 십자가형의 상처에서, 또 우리에게 있어서는 우리가 겪는 모든 병이나 고통, 고난의 상처에서 한 번에 자유롭게 되는 몸이 아니라, 그 모든 고난과 고통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는 몸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 또한 그러합니다. 우리가 겪는 아픔이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하나님의 치유가 일어난다고 해서 그러한 치유가 우리 몸이 제대로 겪어야 할 모든 과정을 생략해버리게 만들지 않습니다. 물론, 이러한 저자의 신학적 성찰에 기초한 비판은, 완벽한 치유가 빠르게 일어날 가능성 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러한 방식의 치유만을 하나님의 치유로 인정하는 것과, 거기에 깔린 잘못된 현실 인식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점은, 저자가 말하는 “완벽한 치유를 위한 기도”에 대한 비판은, 저자가 환자 자신이기 때문에 가능한 면이 있다고 보입니다. 목회자나 사역자가 병으로 고통 받는, 더군다나 빠르게 치유가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는 신자 앞에서 완벽하고 빠른 치유에 대한 언급이 없는 식으로 기도하는 것에도 또한 문제는 있을 수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합당한 현실 인식에 기초한,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라는 사건이 우리의 삶에 가진 함의에 대해서 잘 드러내는 기도라고 해서 그러한 기도를 무조건적으로, 혹은 강제적으로 드리는 것도 목회적으로 지혜로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서평자는 모든 목회자들이 가능하다면 교인들이 고통과 고난을 겪기 전에 그들을 준비시키고 대비시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 말은 결국 목회자들이 교회 안에서 고난과 고통에 대해서 단순히 하나님께서 유익한 것을 준비하셨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데에서 그치지 말고, 신도들이 고난과 고통 앞에서 어떤 감정적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즉 좀 더 솔직해져야 하고, 그래도 괜찮은지, 그리고 오히려 좀 더 솔직해지는 것이 좀 더 성경에 기초한 반응인지)를 가르쳐야 하며, 또 우리 몸이 치유와 회복에 가지는 함의에 대해서,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예수를 따르는 길과 연결이 되어 있는지를 미리 미리 여러가지 방식으로(설교를 통해서, 성경 공부를 통해서, 소그룹을 통해서) 준비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욥기 읽기에서 시작된 고통과 고난 시리즈의 마지막이 되기에 딱 좋은 책이었습니다. 목회적이고 실제적인 차원에서 고통과 고난에 대한 태도를 고민하시는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LIKEELLUL

“Rejoicing in Lament”

Todd Billing’s Rejoicing in Lament is a personal memoir of a patient with incurable cancer, as well as a theologan’s reflections on his journey with the cancer. As a reviewer, I think this book has the following three strengths.

First, the author’s deep theological reflections enmesh with the reality of a patient with incurable cancer, culminating in the incarnation of such reflections.  This means that such highly reflective meditations as the author’s would be able to affect deeply how we live, feel, and think of our lives, which was deeply inspirational to me in that I am interested in reconstruct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ology/doctrine and our lives.

Second, such incarnation of theological reflections show a profound relationship between wisdom and theological reflections.  As Tim Keller said in the previous book review on his book, wisdom is embracing the complex reality as such, thereby broadening and deepening the space in our hearts.  It is not only to acknowledge our incompetency in the face of reality that is irreconcilable on cerebral terms, but also to embrace it as such, and Billings’s book shows that such profound theological reflections enable us to become wise.

Last, the author keenly observes people’s reactions and responses to pain and suffering, as if he were doing participant observation (a social scientific research method in which a researcher’s entering inside the group or community under research, either directly observing what is going on in that community, or interacting with the group members), making such observations the raw materials of their theologizing.  One of the strengths of such participant observation is that the one engaging in theologizing could do the theological work grounded on what is actualy happening.

Therefore, in this review I will discuss two primary topics, one with regard to our relationship to God, and the other with regard to our relationship to each other in terms of how we are led to wisdom in light of the author’s reflections on being diagnosed with the incurable cancer on September 2012, while teaching at Western Theological Seminary.

Our Relationship to God: Piety of Blaming God in Our Lamenting

The author, after being diagnosed with the incurable cancer at the age of 39, began to ask questions as anybody else would ask facing the same situation.  “Why me, God?”  Besides, the cancer which the author was diagnosed with usually gets contracted with those in their late-60s, so it is a rarity for such a younger man as the author to be diagnosed with this particular kind of cancer.  In particular, getting contracted with this kind of cancer when there is little hereditary or environmental possibility for him would make anybody question the same thing, to say nothing of the fact that the author is a Christian. In the face of this reality, the author argues that blaming God and holding God responsible for what has happened is part of true piety, which sounds entirely preposterous.

However, this argument has two valid grounds.  First, the author, as I have dealt with in my review of C.G. Jung’s book on Job, accepts the contention that God is responsible for our pain and suffering.  For pain and suffering is taken in the context not of the dualistic battle between God as the representation of good and Satan as the representation of evil, which no one can be sure of the preponderance of either, but of the total conquerance of God over both good and evil.  Thus, Job kept asking for God’s responsibility, why God allowed Job to suffer such excruciating suffering.  Job’s faith has made Job to engage in conversation with God as to why Job had to suffer, and perhaps to hold God responsible for it, whereas the faith of Job’s 3 friends has made them to insist on the culpability of Job inferred from Job’s suffering.  This implies what kind of attitudes we should have in approaching our own suffering and pain.  As for this, the author gives an example which I also think that many Korean and Korean-American Christians could deeply empathize with.

A pastor friend of mine was talking to a couple who had just lost a child by a miscarriage.  The husband offered no tears.  No emotion.  Just the words, “It was what God ordained.” In this stoic response, he thought he was holding strongly to a “Reformed” view of providence.  But he wasn’t. He rightly confessed that God is King but missed the place of lament and protest—that the fullness of God’s kingdom is not yet here. (85)

People like these I have witnessed myself so many times.  People who wish to be even more pious than God is, those who unquestioningly suppress, even their inclinations to blame God.  People who are saying that such is true piety.  To these Job and the author say entirely different things, which is his second ground.  The author shows from the book of Psalms that the Psalmists are unvariably asking God for the cause of their pain and suffering.  And undercurrent in the reason that they are blaming God and holding God responsible is our covenant relationship with God and the deeply embedded trust on our part toward God therein.  Besides, the lament psalms also show that such blaming of God could coincide with trustin God.

Why have you forgotten me?  Why must I walk about mournfully because the enemy oppresses me? (Ps 42:9) (63)

If translated into modern version, it could go like this: “Why are you sitting idle while you keep saying that you are my rock?  What are you up to when I am going through such hard times?” Personally speaking, I feel rather fortunate that there are so many like these in both Korean and Korean-immigrant churches all over the world, who keep saying that we have to smile, say that we are thankful to God, that it is pious to not show how you actually feel about what has happened.  In sum, it is never impious to show how we feel in the face of pain and suffering, and by so doing we get to hear God’s answer in whatever ways God wills to do (even if it’s not by rational discourse), which will help strengthen our relationship with God. This is one wisdom that the reader can take away from reading the book.

Relationship with Others: Unbelief of Praying for “Total Cure”

While being hospitalized, the author had many visitations from all who were concerned about him, and hear many prayers from their lips.  What he has found in common from all the prayers that he heard them pray is that they all pray for the author’s “total cure” as promptly as possible. This is seen and heard in one person’s public prayer for group meetings, as well as in prayer letters sent in his email inboxes.  However, the author is quick to point out that this prayer for “total cure” as promptly as possible has two evidence for its unbelief in God.

First, prayers of this type neglect the Bible’s commandment to participate in the sufferings of Christ (we could very well participate in Christ’s sufferings in our disease and all the pain coming along with it!), and base its perception of reality on the illusion that the victory of Christ is the only reality that has come upon Christians. (Such tendency is especially pronounced among those who call themselves evangelical Christians. This is often called “triumphalism,” which is far away from the cross of Christ and the faith in it.) In other words, for the believers in Christ, triumphalism believes that pain and suffering are nothing but transition to the eventual victory, presuming that they will be given total healing and restoration in this side of the universe.  Nothing could be farther from the truth of our faith in Christ! This is grounded on the false belief that God is giving the believers whatever they want in the way they want to receive it, which is a distortion of God-image on their part, since our God is not like that!  Alongside this, if they did not receive what they wanted even after praying such prayers, God would be labeled as liar (while he never committed himself to such promise in the first place), resulting in their growing distrust toward God. Thus, the author emphasizes that people need to lament before God as honestly as possible, enabling us to truly rejoice in God which Paul speaks of in the book of Philippians.

Second, prayers for total cure bypass our bodies, which God has created.  The author is particularly critical of the theological assumption in such prayer.

Sometimes Christians assume that prayer for healing needs to take place on our timetable—that if it’s really God who brings healing, it should be an immediate, “shock and awe” experience… God’s healing of the body is frequently a long road that does not bypass the processes of the body itself. (114)

Given that the cancer is incurable, with the 80% recurrence rate, according to the doctor’s diagnosis, prayers for “total cure” precludes any possibility that God will work against our expectations, i.e., in a more ordinary (yet totally justifiable) way. However, such assumption that something more ordinary and mundane will not be likely to be God’s response to our pryaers is closely tied to the triumphalism that was spoken of already, precisely because our inclinations to get rid of the painstaking processes of lamenting in pain and suffering is undercurrent.  However, the fact that we are our bodies, and that our bodies have everything to do with our pain and suffering, and with the restoration process also, makes it awfully difficult to omit such arduous process.  For example, why did Jesus’ body still have the scars from his crucifixion?  This is not just for the purpose of helping Jesus’ disciples recognize who he is, but also for the purpose of the body of Jesus is the human body, which cannot be freed and restored from all the scars and hurts overnight.  This is true of our bodies.  No matter what the nature of our pain and suffering, that is not going to necessarily make the healing process quicken.  Of course, such critique of the author does not deny the possibility that total cure might happen; nonetheless, what he is getting at is the assumption that only something miraculous is God’s, and the false assumption of who God is and what our reality is.

Lastly, the author’s harsh critique of the prayers for “total cure” was possible only because the author himself was also a patient.  More concretely speaking, pastors and ministers visiting patients would not be able to point out what the author has pointed out here, primarily because many uneducated patients, regardless of whether they were believers or not, still long for total cure and quick healing.  Thus, the reviewer would like to make an additional suggestion that education equipping and preparing believers for the times of pain and suffering would be very important.

Other than these topics covered, this book also has many other important issues in the life of faith in view of pain and suffering.  I would highly encourage anyone interested in the topic to pick up the book and read it.

LIKEELLUL

Rejoicing in Lament: Wrestling with Incurable Cancer and Life in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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