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현실을 새롭게 하는 영성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의 묵시-현실을 새롭게 하는 영성(Reversed Thunder: The Revelation of John and the Praying Imagination)는 개인적으로 요한 계시록을 처음 설교하는 목회자나, 처음으로 이 책을 읽어보려고 하는 신앙인이나, 그 밖에 요한 계시록을 처음 접하는 모든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이 시리즈에서 제가 고른 책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 책 또한 요한 계시록의 각 절을 자세하게 주해하는 주해서는 아닙니다만, 전체적인 큰 그림을 보게 해주고, 더 자세한 각 구절에 관한 연구로 나아갈 동력을 제공해주는데 이만한 책이 없다고 할 정도로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서평에서는 일단 이 책에 대한 아쉬운 점에 대해서 간략하게 언급하고, 이후에 이 책에서 피터슨이 요한 계시록의 큰 그림을 어떻게 접근하는가에 대해서 제가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그려보도록 하겠습니다. 피터슨이 요한 계시록을 이해하는 큰 그림을 잡아내는 키워드는 책 제목이 담아내듯이 기도, 상상력, 그리고 예배를 통해 만나는 그리스도의 현존입니다.

현존에 집중하는 일의 급박함

일단 이 책이 가진 본질적인 한계는 피터슨이 서문에서 인정했다시피 각 구절에 대한 자세한 주해를 담고 있는 책이 아니기에 그런 부분에 대한 공부를 원하는 독자들은 조금 실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사실 애초에 이 책을 읽을 때 그런 부분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고 읽기 시작했기에 오히려 3장에서 계시록 본문 1:12-20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읽으면서 굉장히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후 4장에서 계시록 본문 2-3장의 일곱 교회에 대한 설명에서는 그런 기대가 다시 깨졌습니다. 3장과는 달리 본문으로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거든요.) 3장에서 피터슨은 특별히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와 조우하면서 그 분의 인상에 대해서 자세하게 묘사한 부분에 담긴 문학적 비유와 장치들에 대해서 누구든지 알기 쉽게, 하지만 깊은 의미를 잘 살려내면서 설명을 해나갑니다. 예를 들면, 1:13절의 “인자와 같은 이”가 다니엘 7:14-15절의 인자에 대한 언급을 떠올리게 하기 위한 장치임을 상기시키면서, 피터슨은 다니엘서와 요한 계시록 사이에 쓰여진 에녹서(the book of Enoch)같은 책을 보면, 다니엘서에 언급된 “인자”에 대해서 그 두 책이 쓰여진 기간 사이에 살았던 사람들이 가졌던 “인자”에 대한 기대치가 굉장히 올라갔음을 언급합니다. 즉 신적인 존재로서 우주를 채우고 다스리며, 생명을 공급하는 이를 암시할 때 인자를 언급하고 있다는 말이죠. (이후에도 1:13에서 묘사되는 그리스도의 모습—발에 끌리는 옷과 가슴의 금띠는 출 29:5에서 아론의 제사장 복장을 암시한다는 것, 그리고 흰 양털 같은 머리털과 불꽃 같은 눈은 선지자의 직분을 암시한다는 것, 그래서 그리스도의 제사장 되시며 선지자되심을 이런 복장과 묘사가 나타낸다는 것—그 외에도 그 분께서 오른손에 들고 계신 일곱 별, 그리고 그 분 뒤의 일곱 촛대 등이 어떻게 그 분의 메시야되심을 나타내고 있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합니다. 정말 흥미진진하니까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들은 책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계시록의 독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맞닥뜨리면서, 특별히 그 분이 스스로를 인자라고 언급하는 것을 보면서 그러한 기대가 산산히 무너지게 되었다고 피터슨은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들이 생각하는 그런 권위와 권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단순한 랍비였고, 비록 때때로 기적과 치유를 일으키긴 했지만, 그의 죽음은 초라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그를 넘어선 범죄자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후의 그리스도인들은 반대의 경우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즉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그 분의 직계 제자들의 가르침과 증언, 특별히 부활의 경험과 목격을 통해서 마침내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면, 그들이 처한 현실은 그렇게 위대하신 통치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그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힘들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고통스러운 현실이 바로 요한 계시록이 쓰여진 맥락이 됩니다. 피터슨은 계시록이 쓰여진 까닭은 21세기의 현대인들이 다가올 종말에 대해서 예측하고 알아맞출 수 있게 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고통스러운 핍박과 고난의 현실의 한 가운데를 지나가고 있는 초기 교회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또 현재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러한 고난의 현실이 아닌, 그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보고, 들으며, 거기에 집중하게 하려는 데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피터슨에게, 또한 요한에게도, 계시록은 현재의 정치적 사건들을 바탕으로 미래의 종말에 대해서 점을 치는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계시록이 가진 급박함은 그 당시의 정치적 사건이든지, 현재의 정치적 사건이든지, 그 기저부에 있는 하나님의 현존에 “집중”해야 한다는데 있습니다. 여기서 키워드는 현존과 집중입니다. 즉, 그 당시의 맥락에서도 지금 현재, 지금의 맥락에서도 지금 현재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피터슨은 이 시점에서 시인 워커 퍼시(Walker Percy)의 책의 일부를 인용하는데, 아주 적절한 인용이라고 생각되어서 이 곳에서도 인용합니다.

그의 소설 재림(the Second Coming)에서 워커 퍼시(Walker Percy)이런 질문을 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마치 누군가가 비행기를 놓치듯이 놓치게 되는 것이 가능한가요?” 거기에 대한 대답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아는 시간이 정해진 기한(chronos)으로서의 시간이 전부라면 말입니다. 퍼시는 그러한 삶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인생 전체에서 번도 자신의 고요한 중심에서부터 쉼을 누린 적이 없으며, 계속해서 자신을 자신이 기억도 하지 못하는 어떤 어두운 과거에서부터, 지금 있지도 않은 미래로 밀어넣는데 평생을 소비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번도 지금의 삶을 위한 현재를 살았던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결국 꿈처럼 지나가 버렸습니다 (192).

그리고 이런 면에서 피터슨은 요한 계시록을 지극히 목회적으로 접근합니다. 그 말인 즉, 요한 계시록은 알 수 없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측하기 위해서 풀어내야 할 비밀 암호들로 채워놓은 책이 아니라, 바로 현재,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하고 계신 일들에 집중하게 만드는 책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피터슨의 신학은 모두 목회를 위한 것이며, 피터슨에게 있어서 요한 계시록의 저자인 요한은 일곱 교회들을 섬기는 목회자로서, 그 일곱 교회들이 어려운 현실 속에서 견뎌낼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계시록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피터슨 또한 목회자로서 요한 계시록을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집중하도록, 계시록 22장을 열한가지 그리스도인의 삶과 깊은 관련이 있는 주제(성경, 그리스도, 교회, 예배, 악, 기도, 증인, 정치, 심판, 구원, 천국)로 묶어서 책을 엮고 있습니다. 각각의 주제들을 하나로 묶어내기가 꽤 어렵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피터슨은 영민하게도 이미 앞에서 언급했던 세가지 주제, 즉 기도, 상상력, 그리고 예배를 통해 만나는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잘 묶어냅니다. 남은 서평에서는 각각의 주제들이 어떻게 요한 계시록 전체를 묶어내는지에 대해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역으로 올라가는 천둥(reversed thunder), 그리고 예배를 통한 어린 양의 정치

이 책의 원제목은 한국어판과는 달리 계시록 8:5의 “천둥”(peals of thunder)라는 말이 성도들의 기도가 하늘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닿았다가, 그 이후에 천사를 통해서 땅에 부어졌을 때 일어난 현상이라는 데에 착안해서 조지 허버트(George Hebert)가 기도를 역으로 올라가는 천둥(reversed thunder)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빌어서 그런 제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피터슨이 요한 계시록의 중심적 주제로서 성도들의 기도를 놓고 있다는 것을 제목에서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피터슨은 왜 기도를 역으로 올라가는 천둥이라고 부를 정도로 요한 계시록의 중심 주제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그것은 바로 기도가 우리를 고통스러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이런 기능에는 자연스럽게 상상력이 깊이 연관되게 됩니다. 왜냐하면 상상한다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오감을 넘어서는 일일 뿐 아니라, 오감을 통해서 우리 안에 깊이 들어와 있는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뛰어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상력은 단순히 현실에 대한 회피나 소극적 대응과는 거리가 멉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완전히 고립되어서, 마치 수도 집단 처럼 세상 바깥에 사는 사람들이 아닌 이상 자신들이 살아가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현실에서 도피하거나 회피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요한이 계시록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현실이 펼쳐지는 곳, 그렇게 현실을 펼쳐나가는 자들의 마음의 중심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그들이 펼쳐나가려고 하는 현실과는 완전히 다른 하나님의 현실을 바로 지금 여기서 살아나가라고 믿는 이들에게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현실을 살아내려면 그러한 현실을 보고 들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요한 계시록은 피터슨에 의하면 신앙인들에게 닥친 그렇게 암울한 현실 뒤에, 그들의 외치는 기도라는 울부짖음 뒤에서 그 모든 기도를 듣고 보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현실을 과연 신앙인들이 보고 들을 수 있느냐, 새로운 상상력을 발현할 수 있느냐는 문제를 집요하게 다루는 책입니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역으로 올라가는 천둥(Reversed Thunder)이라는, 기도를 가리키는 조지 허버트의 이 표현은 그런 면에서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역으로 올라가는 천둥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천둥은 궁극적으로 계시록 4-5장이 그려내는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 왕좌에 앉게 되시는 하나님 나라, 그리고 그 나라를 기뻐하며 어린 양을 예배하는 백성들이 환호하게 되는 시간을 가져올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현재, 어린 양의 정치(the politics of the Lamb)와 계시록 12장에 등장하는 용의 정치(the politics of the Dragon)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습니다. 정치를 구성하는 2가지 요소를 힘으로 다스림, 그리고 그러한 힘이 사용되는 방식이라고 한다면 더더군다나 말입니다. 피터슨은 그 차이를 극명하게 표현합니다.

그러한 차이는 정치적으로 보면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사용해서 권력을 가지려고 하거나 (혹은 만약 별로 능숙하지 못하다면 그들에게 이용당하거나), 또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언약의 관계를 맺음을 통해서 구원의 능력이 이웃과 사회,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세상에 전파되도록 하느냐의 차이입니다 (132-33).

사실 이런 차이는 단순히 누군가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느냐 혹은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는 아닙니다. 잘 알려진 목회자들 중에서도 정치적으로 용의 정치를 따르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고, 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신앙인들 중에 오히려 어린 양의 정치를 더욱 잘 따르는 사람들이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용의 정치를 따르느냐, 어린 양의 정치를 따르느냐는 사실 누군가가 목사이냐, 신학생이냐, 기독교 관련 직종에서 종사하고 있느냐, 혹은 심지어 그가 찬양을 뜨겁게 부르며 기도에 열심을 내느냐 또는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느냐의 문제와 별 관련이 없습니다. 그 모든 것에 다 해당이 되면서도 여전히 용의 정치를 따르는 자들이 교회 안에서 존경과 명망을 다 얻으며 떡하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기도 하고, 아무런 드러낼 직함이 없으면서도 어린 양의 정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교회의 주변부에서 조용히 그 길을 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피터슨은 이 모든 것의 절정을 예배에 담아냅니다. 피터슨에 의하면 예배란 중심이 생기게 하며(centers), 중심으로 모으며(gathers), 중심을 드러내며(reveals), 중심을 노래하며(sings),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심을 긍정(affirms)하는 5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행위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예배는 그러한 본능에 정면으로 배치되어,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 바로 그 당신께서 몸소 그러한 스스로의 이기적 본능을 대적하셔서 죽임을 당하신 그 분을 내 삶의 중심에 놓는 행위입니다. 예배란 내가 중심이 아닌, 그 분의 길과 뜻, 그 분의 계획과 삶의 방식이 나의 중심이 되기를 원하는 자들을 그 분이 모으시는 (gathers) 것이며, 그렇게 모인 자들 앞에서 그 분은 당신의 본질을 드러내십니다(reveals). 그렇게 드러난 죽임 당하신 어린 양 앞에 자신들의 중심을 내어준 모든 자들은 찬양하며 노래합니다(sings). 그리고 그 분은 마지막으로, 그렇게 모인 자들의 삶, 그리고 그 삶의 의미를 긍정하십니다. 피터슨은 이 말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성경이 읽혀지고 선포되어질 그러한 성경은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나의 삶의 의미드러내실 아니라, 삶의 최종적 목적지를 실현해 내심을 밝혀냅니다”(65).  결국 각각의 개인이 자신의 삶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고 예배드리기 시작할 때,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개인의 삶에 내재하는 자기 인정에 관한 욕구를 채워주시며, 애초에 개인이 인정에 관한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추구하려고 했던 것들보다 더욱 위대하고 거룩한 길로 개인의 삶을 이끄셔서, 궁극적으로 개인의 삶의 중심이 그 분이 되실 뿐만 아니라, 그 분이 삶의 중심이 되심을 통해서 개인의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채워주신다는 말입니다. 예배는 이 모든 일들이 벌어지는 장이 됩니다. 그리고 요한 계시록은 이 모든 것들을 종합적으로 표현해내고 있습니다. 개인의 문제, 공동체의 문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현실, 역사적 상황, 위정자들의 이기적 추구, 그 배후에 존재하는 용과 바다, 육지의 짐승,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주적 의미를 밝히신 것, 역사의 의미가 드러난 것, 악과의 투쟁, 교회, 이 모든 것들이 복잡한 요한 계시록이라는 드라마를 통해서 밝혀지고 있고, 성도와 교회는 그러한 복잡한 드라마 속에서 자신의 위치, 자신이 가야할 길과 처한 상황에 대한 자세한 안내를 제공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육안으로 볼 때 명확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것이며, 하나님의 현실을 바라볼 상상력이 필요한 것이며, 예배를 통해서 또 다른 하나님의 현실에 내 마음과 인생의 의미를 두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피터슨은 이렇게 복잡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목회적으로, 또 신학적으로 잘 그려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주에는 요한 계시록 읽기의 세번째 책인 마이클 고먼(Michael Gorman)의 요한 계시록 책임 있게 읽기(Reading Revelation Responsibly)라는 책을 서평하도록 하겠습니다.

LIKEELLUL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