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의 죽음

우리 몸에 새겨진 인종의 이야기, 우리 몸에 새기는 예수의 이야기-브라이언 반툼의 인종의 죽음(The Death of Race)

오늘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담으로 서평을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 가족이 미국에 처음 이민 왔을 때, 가족 모두가 운전 면허를 따고 차를 산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버지와 함께 LA에 나갈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운전을 했고, 우리는 처음 나가는 미국의 복잡한 도시에서 행여나 우리가 길을 잃거나 또 다른 예상치 못했던 어려운 일을 당할까봐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LA 시내에 도착해서 볼 일을 모두 끝내고, 집에 돌아오는 길은 마침 러시 아워(Rush Hour) 시간이었기 때문에 차가 좀 밀리고 있었습니다. 시간은 약 저녁 6시 정도였고, 마침 계절도 지금같은 늦가을이어서 해가 꽤 빨리 져버린 날이었지요. 헤드라이트를 켜기 시작한, 혹은 이미 켠 수많은 차들 사이에서 아버지와 나는 혹시라도 너무 어두워져서 집에 돌아가게 되는 건 아닌지, 약간 마음이 급해져 있던 상태였습니다. 바로 그 때, 흑인 노숙자 아저씨가 우리 차가 있는 쪽으로 걸어 왔습니다. 그 아저씨의 옷차림은 노숙자 치고는 아주 남루하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저녁이었고, 또 우리가 생전 처음 가보는 LA라는 (밤에는 꽤 위험하다고 소문이 난) 도시에서 만난 흑인 노숙자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큰 위협이었나 봅니다. 아버지는 그 사람이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본 즉시 나에게 “차 문 잠가!”라고 소리치셨고, 그 소리에 깜짝 놀란 나는 바로 문을 잠갔습니다. 하지만 그 흑인 노숙자 아저씨는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게 아니었고, 그냥 길을 지나가는 것이었고, 아버지와 나는 흠칫 했다가 다시 안심했지요.

누구나 흔히 겪을 수 있을 만한(?) 이런 얘기는 사실 인종이라는 이야기가 얼마나 우리 몸에 깊이 새겨져 있는지, 또 그렇게 새겨진 이야기가 단지 예외적인 개인들 몇 명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광범위하게 사회의 각 구성원들에게 퍼져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한국에 계시는 분들은 어쩌면 인종에 관한 갈등, 그리고 그를 둘러싼 모든 이야기가 저처럼 미국에 이민 와서 사는 사람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인종의 이야기는 이미 한국에도 깊이 자리를 잡고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는 미국으로 대변되는 백인들의 문명과 문화를 우러러보는 한 편, 백인이 아니고 한국인이 아닌 사람들, 특히 동남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나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을 하대하고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경향은 신앙과는 상관 없이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기독 교회가 신앙을 단순히 교회에서의 활동으로 환원해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신앙이 우리가 사람들과 맺는 관계,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과 얼마나 깊은 관계가 있는지는 저절로 놓치게 되는 것이죠. 소위 한국의 복음주의 신앙의 맹점 중에 하나가 우리가 살아가는 문화를 통해서 우리를 설득하고 우리의 삶과 관계, 그리고 몸에 자리잡는 이야기들을 제대로 분별해내지도, 또 예수의 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들을 거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도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서평할 브라이언 반툼의 인종의 죽음(The Death of Race)는 아주 중요한, 그리고 큰 도움이 될 만한 책입니다.

반툼은 일단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책을 시작합니다. 그 이야기는 자신의 인종적, 종교적 회심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첫번째로, 인종적 회심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반툼의 어머니는 백인이며, 아버지는 흑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툼은 어린 시절 자신이 백인인지 흑인인지 확실하지 않았지만, 자신은 백인이 되기를 바라면서 자랐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열아홉살 되던 해, 반툼은 자신의 몸에 대해서 이제까지 스스로 받아들였던 이야기, 즉 자신은 백인이며, 만약 백인으로 사람들이 자신을 봐주지 않는다고 해도 계속해서 백인인 척 하기로 할 거라는 그 이야기를 직면했어야 했다고 말합니다. 정확하게 어떤 계기로 그러한 직면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반툼이 언급했던 청소년 시절 이성 교제를 통해서 백인 여자 아이들이 자신을 백인으로 봐주지 않았던 경험, 그리고 그와 유사한 인종적 갈등과 긴장의 경험들이 쌓여서 한 순간에 그로 하여금 자신을 흑인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직면을 하게 됐던 것 같습니다. 두번째로 종교적 회심의 경우 반툼은 자신의 흑인 아버지가 백인 어머니와 이혼하고 집을 나가서 살다가, 자신이 열여섯살 때, 갑자기 집에 돌아와서 자신이 말기암 환자이며, 이제 살 날이 3개월 밖에 안 남았지만, 그럼에도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사람이 된 것을 보았고,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비록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저자는 아버지에게 사랑받는다는 경험,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경험을 이 때 해보았던 것 같고, 그런 아버지의 하나님을 자신도 받아들이게 된 것 같습니다.

이 두가지 회심의 경험은 이후 반툼으로 하여금 인종의 이야기와 예수의 이야기 사이에 피할 수 없는 갈등이 있음을 보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인종의 이야기는 사람의 몸을 계층화시키는 반면, 예수의 이야기는 그런 계층화를 모두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반툼의 이 책은 그러한 탐구의 결과물이라고 보아도 좋을 겁니다. 이 책이 가진 도드라진 점은 무엇보다도 현실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그에 상응하는 날카로운 성경 읽기,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한 교리 읽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툼의 현실에 대한 분석과 성경 읽어내기, 그리고 교리 읽어내기를 하나로 꿰뚫는, 그가 자주 쓰는 메타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몸은 일을 한다(The body does the work.)라는 말입니다. 이야기는 몸에 녹아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보여지는 것이며, 우리는 우리의 몸을 볼 때, 다른 사람들의 몸을 볼 때 문화가 우리 각각의 몸에 녹여낸 이야기를 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일을 합니다. 어떤 일이냐고요? 반툼은 여기서 다시 개인적인 경험으로 돌아가서 자신이 말하는 메타포를 쉽게 설명합니다. 반툼이 걸어다니면, 사람들은 반툼을 바라보고 그의 피부색이 검기 때문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냅니다. 때로는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기도 합니다. 반툼은 그들과 얘기해 본 적도 없지만, 사람들은 이미 자신들 안에 내재된 인종주의의 이야기를 통해서 반툼의 몸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툼을 인종주의의 이야기 안에서 소화하고 해석하며, 마침내 반툼의 몸을 그렇게 치부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고 LA에 나갔다가 다가오는 흑인 노숙자를 보고 놀라서 차문을 잠갔던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몸은 일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인종주의 이야기 속에 녹아들어간 우리의 문화가 특정한 몸이 내는 소리를 막아버린다는 겁니다. 기회조차 박탈해 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문화와 그 이야기는 소리내지 못하는 몸, 기회를 잃어버린 몸들이 만연하는 문화입니다. 몸이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응하는 몸은 예수의 몸입니다. 반툼에 의하면, 예수의 몸도 일을 합니다. 예수의 몸은 당시 무시 당하고 천대를 받았던 유대인의 몸이었습니다. 비록 남자의 몸이었지만, 여성들이 겪는, 그리고 그 당시에 마치 지금의 인종 차별주의가 그렇듯이 억압과 질고를 당하는 모든 몸들을 해방하는 몸이었습니다. 그래서 반툼은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께서 우물가의 여인을 만난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의 몸이 어떻게 그 당시의 사회가 우물가의 여인에게 가하고 있던 폭력과 압제를 폭로하고 드러내며, 그 여인의 몸을 어떻게 그러한 폭력과 압제에서 자유케 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반툼은 여기서 저명한 신약 학자이자 대중 작가인 톰 라이트(NT Wright)가 그의 책 “하나님은 어떻게 왕이 되셨나”에서 드러냈던 문제 의식을 고스란히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라이트는 이제껏 사복음서가 바울의 눈으로, 전통적인 신앙 고백의 눈으로 읽혀져 왔으며, 그래서 “예수께서 왜 사셨는가?”라는 질문에 기독교인들이 잘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나 전통적인 신앙 고백들은 예수께서 왜 사셨는지보다는, 예수께서 왜 돌아가셨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니까요.  어쩌면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인종 차별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데에는 예수께서 사신 삶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이 없는 채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만 집중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반툼은 우리가 예수의 몸이 행했던 일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을 통해서 드러난 이야기에 침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이미 강조했다시피, 몸은 단순한 몸일 수 없고, 항상 어떤 이야기 속에서 이해되고 소화되기 때문입니다. 몸을 통해서 드러나는 인종의 이야기에 맞서서 예수의 이야기는 이제까지 그들의 몸 때문에 그들에게 주어진 삶을 제대로 살아낼 기회조차 박탈 당한 사람들, 특별히 소수 인종에 속한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할 기회를 줍니다. 여기서 반툼은 계속해서 떳떳하게 보여지는 것(being seen)을 강조합니다. 인종 차별은 차별받는 이들이 자신들의 몸을 떳떳하게 볼 수 없게 만듭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저 특정한 몸을 가지고 태어났다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떳떳하지 못하게 됩니다. 즉 구조적인 수치가 특정 인종 그룹에 속한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것이 사회적으로 정당화되는 구조가 바로 인종 차별 주의라는 것입니다. 반툼이 책 전체를 통해서 계속적으로 “보여지는 것 (being seen)”을 강조하는 것은 저에게는 특히 인상적입니다. 사실 “보여지는 것”의 언어는 수치심과 관련된 용어이고, 결국 반툼이 이 책에서 하고 있는 작업은 따지고 보면 인종 차별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차별과 억압에 구조적인 차원에서의 수치심이 피해자들과 약자들에게 가해진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이 책에서 못내 아쉬웠던 점은, 비록 반툼이 “벌거벗겨진, 그리고 수치스러운”(Naked and Shamed)라는 주제로 창세기에서 아담과 이브가 타락에 이르게 된 과정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현재의 인종 차별에서 드러나는 병폐, 특히 구조적인 수치와 연결시키는 작업을 하면서도 정작 인종 차별을 죄라는 카테고리로 분류할 때에는 기존의 전통적인 죄책의 언어만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런 잠재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호소는 꽤나 강력합니다. 책 제목이 보여주듯이, 반툼은 인종이 사라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피부색으로 구분되어지는 사람들 사이의 다양성이 사라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의 몸을 특정한 이야기, 특히 계층화시키는 이야기 속에 놓고 모든 사람들을 그 속에서 이해하는 그런 이야기가 사라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반툼에게 예수의 삶의 이야기 (그 분의 죽음의 이야기가 아닌) 는 제대로 읽어내면 인종을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 말은 우리 신앙인들이 예수의 삶의 이야기가 우리의 삶의 이야기에 전하는 메세지가 어떤 것인지 좀 더 집중해서 봐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는 오직 예수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기에, 삶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일 거구요. 다음 시간에는 번외로 서평하기로 했던 캐시 오닐의 “대량 살상 수학 무기”를 가지고 찾아오겠습니다.

서평 쓰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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