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얼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봄필립 제이미슨(Philip Jamieson) 용서의 얼굴(The Face of Forgiveness)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시 27:8)

누군가의 얼굴에는 그 사람의 우리를 향한 감정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갓 태어난 아기는 자신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어머니의 얼굴을 통해서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부모님과의 관계에 멈추지 않습니다. 실상 우리의 삶은 관계의 연속일 수 밖에 없는데, 그러한 관계 맺음에서 얼굴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우리를 인정해주지 않는 얼굴들, 우리에게 분노하는 얼굴들, 때로는 거울 속에 비춰진 우리 자신의 얼굴에서도 우리는 스스로를 부정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실상 우리가 맺는 관계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우리 스스로에게 깨우쳐 주는데 가장 필수적입니다. 즉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맺는 관계를 통해서 형성되는데, 그러한 정체성 형성에 큰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바로 누군가의 얼굴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시피, 우리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경우가 있는 그대로 인정받게 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 험한 세상 살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큰 위로가 되며, 더 나아가서 우리의 얼굴이 그 분의 얼굴과 같이 되도록,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우리의 얼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게 되도록 우리의 전존재를 바꿉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얼굴은, 팀 켈러(Tim Keller)가 말했듯이, 또 이미 서평했던 수치의 영혼(The Soul of Shame)의 저자 커트 톰슨(Curt Thompson)이 말했듯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잘 모르고 사랑하는 것도,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점점 더 잘 알아가게 되면서 싫어하게 되는 것도 아닌, 우리를 속속들이 알고 있으면서도 사랑해주는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그 얼굴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우리는 그 얼굴을 닮습니다. 마치 서로 깊이 사랑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 얼굴을 바라보는데 오랜 시간을 투자한 부부는 서로 닮아가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신앙에 있어서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가장 기본적인 관계 맺음이면서도 가장 어려운 관계 맺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다지 받아들여질만한 존재가 아닌 것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우리가 받아주어야 할 사람들 또한 그다지 받아들여질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점점 더 배워가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여질만하지 않은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를 먼저 받아주신 분의 변함없는 얼굴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지 않고서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필립 제이미슨의 용서의 얼굴이 말하는 주된 메세지인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신앙이라는 말은 항상 큰 용기가 됩니다.

하지만 사실 여기까지는 뻔합니다. 우리가 대중적인 설교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죠. 만약 이런 얘기만을 하고자 한다면 사실 비슷한 책들은 아주 많습니다. 하지만 필립 제이미슨의 던지는 질문은, 만약 이런 얘기들이 그렇게 기독교 서클에서 흔하게 받아들여지는 얘기들이라면, 과연 그 신학적 근거는 무엇인가입니다. 그리고 제이미슨은 특별히 죄론과 속죄론, 이 두 교리 영역을 깊이 파고들어갑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면 제이미슨이 던지는 질문은 이런 겁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과 그 분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 사이에는 어떤 신학적 연결 고리가 있는 걸까? 즉 어떤 신학적 논리가 저러한 대중적 메세지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걸까?라는 질문이 제이미슨이 주로 이 책에서 묻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죄”란 어떤 것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며, 또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예수께서 어떻게 죄를 해결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먼저 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일단 제이미슨이 지적하는 것은 죄의 관계성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관계를 파괴시키는 죄의 능력입니다. 이미 앞서서 말했다시피 관계성을 파괴시킨다는 말은 곧 우리의 정체성을 흐릿하게 만든다는 말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체성은 오직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해서만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서구 신학은 죄책에 대한 강력한 강조로 인해서 죄의 관계성보다는, 행위로서의 죄에 집중해 왔습니다. 사실 죄는 관계성을 가지며, 행위이기도 한데, 이것을 강조하면서 저것을 놓치기보다는, 이것도 붙잡고 저것도 놓치지 말아야 죄가 어떤 것인지를 좀 더 깊이 알 수 있을 겁니다. 이미 앞선 서평에서도 말했다시피, 죄가 가지는 폐해는 크게 죄책, 수치, 그리고 공포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 중 죄책은 우리가 행한 특정한 잘못된 행위에 대한 책망이며, 수치는 그러한 잘못 때문에 우리의 존재 자체를 책망하는 것입니다. 즉 죄책은 우리의 행위에 집중하며, 수치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서구 신학이 죄책에 집중해 왔다는 강력한 증거로 제이미슨은 저명한 신학자인 T.F. Torrance가 라틴 이단(Latin Heresy)이라고 부르는 신학적 오류를 예로 듭니다. 토랜스에 의하면 라틴 이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중립적인 것으로 가정하고,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이 죄성에 직접 참예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 분의 인간성이 우리의 죄성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우리가 행하는 잘못된 행위에 집중된다는 함의를 저절로 가지게 됩니다. 따라서 죄책에 대한 제거가 그 분의 주된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토랜스는 이에 대한 대표적인 반박으로 초대 교부인 이레나이우스(Irenaeus)의 재현설(recapitulation)을 예로 들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우리의 죄성 전체에 온전히 참예(participate)하였으며, 그 분께서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는 것과 그 분의 인간성이 우리의 죄성에 참예하지 않았다고 하는 말은 전적으로 다름을 주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고후 5:21에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행위적 파괴성 뿐만 아니라, 관계적 파괴성에까지 참예하신 것입니다. 사실 행위와 관계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관계가 비틀어지면 행위적인 차원에서의 죄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셨습니다. 그 분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셨던 형벌은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당신이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고 계시며 온전한 사랑의 하나됨의 관계를 가지고 계시는 아버지와 성령님과의 관계의 끊어짐입니다. 이미 앞에서 얘기했다시피, 우리 주변의 사람들의 얼굴이 우리를 부정적으로 바라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힘이 되는 까닭은 그 분의 얼굴이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짓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아무 잘못이 없으셨음에도 형벌의 자리에 올라가는 길을 가실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 제이미슨은 아버지의 얼굴을 예수께서 계속해서 바라보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바라보고 계시던 그 아버지의 얼굴이 시선을 돌리시는 것을 경험하셨던 장이 바로 십자가형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와 정체성을 결정지어주는 무언가가, 누군가가 갑자기 그 관계를 끊어버리게 될 때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은 우리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이며, 거기서 느끼게 되는 것이 바로 수치입니다. 제이미슨은 이런 면을 지적하면서, 이런 관계성의 부정, 정체성의 부정, 더 나아가 존재의 부정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일이었기 때문에 시편 22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의 탄식이 그 분의 탄식이 되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일 뿐 아니라, 동시에 죄책에 강조점을 두는 죄 이해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호도하고 왜곡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죄로 인해서 아버지와 성령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바로 그 자리에 우리가 들어가서 양자됨을 얻게 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느끼신 바로 그 수치심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 수치스럽게 느끼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내러티브 속에서 보자면, 우리가 얻게 된 죄의 용서에는 수치심으로부터의 자유가 유기적으로 굉장히 중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구 신학이 죄책에만 강조점을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제한하는 것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죄의 용서를 죄책이라는 차원에서만 이해한다면, 수치심이 점점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 문화 속에서 죄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하기도, 또 속죄 사역에 대해서 말하기도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에 죄 언어의 회복을 위해서라도 수치심에 관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대해서 더 깊이 살펴봐야 할 필요성은 충분하다고 판단됩니다.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신학적 분석은 Mark Baker와 Joel Green이 공저한 Recovering the Scandal of the Cross를 참조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 이 책은 저의 서평 계획에는 올라와 있지는 않지만, 기회가 된다면 저도 서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정도가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입니다. 물론 이 외에도 실천적인 측면에서 죄 고백의 중요성, 공동체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다룹니다. 실천적인 측면은 마지막 챕터에서 다루는데, 죄 고백과 공동체가 어떻게 수치심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지에 가볍게 언급하고 지나가는 정도로 다루지 않고, 꽤 깊이 들어가기 때문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책을 사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책은 전체적으로 꽤나 칼 바르트의 신학에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드러냅니다. 죄에 대한 해결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삼위일체적인 차원에서 일어난 일임을 강조하는 것에서부터, 죄에 대한 상담 혹은 치료 차원에서의 이해는 인간의 행위적인 측면만을 부각시켜서 겉으로 드러난 증상만을 해결할 뿐, 깊은 차원에서의 관계적인 문제를 다루지는 못한다는 것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관계적으로 이해하는 것에도, 여기저기에 바르트 신학의 흔적이 많이 묻어있습니다. 따라서 바르트 신학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그 신학의 목회적 함의를 다루는 책이라는 면에서 크게 유익을 줄 것입니다. 하지만 바르트 신학을 좋아하지 않으시는 분들에게도, 적어도 삼위일체적인 속죄론이나, 죄에 대한 이해가 단순히 상담이나 치유적인 면에 머무를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호소력이 있는 지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책에서 유일하게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던 지점은, 서구 문화에 왜, 어떻게 수치심이 죄책보다 더 크게 자리잡게 되었는지를 분석하는 부분입니다. 몇몇 저자들의 책(예를 들면 Ruth LeysFrom Guilt to Shame)을 참고하긴 하는데, 그 내용이 상대적으로 짧고, 별로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좀 더 연구해 봐야 할 필요를 느끼는 부분입니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수치심과 죄의 관계,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수치심을 제거하는 신학적 과정과 논리를 살펴보는데 탁월한 책입니다. 아울러 이 책을 발판 삼아 더욱 깊은 역사적, 신학적, 실천적 차원에서의 논리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될 만한 기초적인 내용을 많이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서평했던 커트 톰슨(Curt Thompson)의 수치의 영혼(The Soul of Shame)이나, 다음 주에 서평할 제이슨 조지스(Jayson Georges)와 마크 베이커(Mark Baker)의 Ministering in Honor-Shame Cultures와 함께 읽으면 신학적으로, 목회적으로, 실천적으로 여러 차원에서 목회자든, 신학자든, 일반 신앙인이든 상관 없이 크게 유익을 끼칠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The Face of Forgiveness

LIKEELL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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