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탕한 선지자

요나의 국가 복음과 야훼의 보편 복음의 충돌, 그리고 켈러의 지적 불성실함(?) 잠재적 비판 지점들 켈러의 방탕한 선지자(The Prodigal Prophet)

팀 켈러는 2008년 이후 매해 거의 2-3권의 책을 쏟아냈습니다. 평범한 작가가 1년에 책 한 권 내기가 어려운게 현실이라고 할 때, 말 그대로 엄청나게 쏟아냈다고 봐야겠죠. 거기에는 그가 1970년대 중반에 사역을 시작한 이후 쌓아놓고 있던 모든 책의 자료거리들을 지난 10년 간 거의 쏟아내다시피 했기에, 상대적으로 다른 저자들보다 책을 내기가 어렵지 않았으리라 추측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책을 내는 속도가 좀 느려지고 있습니다. 1년에 한 권 정도를 내는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2017년 11월에 잠언 묵상집을 낸 이후, 요나서에 대한 책이 거의 1년 만인 2018년 10월에 나왔으니까요. 지난 30년간 목회와 집필을 같이 하시면서 정리하셨던 것들을 이제 거의 다 출간하신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것은 저의 추측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2017년에 리디머 교회에서 은퇴한 이후, 켈러는 이제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일, 그리고 리디머 교회의 교회 개척 기관인 Redeemer City to City같은 기관 사역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연구에 좀 더 천착하시면서 얻게 되는 결과물들을 앞으로도 더 나누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만, 이번 요나에 대한 책은 조금 실망스러운 면이 있었습니다. 이전의 책이나 강의들에서 이미 나온 내용들을 다시 재탕하는 경우가 꽤 잦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나에 대해서 이미 “내가 만든 신”에서 한 챕터를 할애해서 다루었고, 이번 책은 그 책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좀 더 심화해서 다루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할 겁니다. 어쨌든, 제가 켈러의 모든 저서들을 다 읽었기 때문에 이런 내용 반복이 더 실망스럽게 다가왔을 수도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 The Prodigal Prophet은 현대인들에게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복음을 소통한다는 이 거대한 작업에 관한 한 켈러가 가진 모든 장점이 총체적으로 집약된, 아주 좋은 책이라고 자신있게 평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시며,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고자 하시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신앙이란,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의 삶과 앎, 그리고 관계로 끊임없이 답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켈러는 이 책에서 요나 이야기를 통해서 이 질문에 대한 굉장히 종합적인 답을 제시합니다. 그렇기에 이 책에는 켈러가 그 동안 이야기하던 것들이 조금씩 모두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켈러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에 대해서 개략적으로 알고 싶으신 분들은 이 책을 읽으신다면 그 전반적인 그림을 보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이 책에서 켈러는 요나가 가지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어떻게 요나 자신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상통하는지를 보여주며, 따라서 요나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올바르게 깨닫게 되면 될수록 어떻게 자신 안에 있던 자기 의로움(self-righteousness)을 내려놓게 되는지, 그리고 점점 더 이전의 자기 정체성에서 멀어지게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러한 올바른 하나님 이해와 자기 이해가 어떻게 이웃 사랑과 사회 정의, 그리고 공적인 신앙 표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게 켈러가 이 책에서 하는 얘기의 처음이자 끝이며, 전체입니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깊어지는 것은 반드시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두가지 이해가 깊어진다는 증거는 우리가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수용하며 감싸안는 능력이 커진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지적인 이해가 깊어지는 것도, 영적 훈련이나 실천에 능해지는 것도, 심지어 이웃 봉사가 우리의 삶에서 더욱 많아지는 것도,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간다는 잣대가 될 수 없습니다. (존 칼빈이 그의 걸작인 기독교 강요에서 이미 이 얘기를 했다는 것, 그리고 성경이 이미 이 얘기로 가득찬 책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지 않은 까닭은 아마 그래서일 겁니다.)

먼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것에 관해서 얘기해 봅시다. 켈러는 책에서 베드로의 헌신과 배신에 관해서 얘기합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새벽에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강력히 부인하며, 자신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 그런 상황이 벌어지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합니다. 켈러는 여기에 내가 이해하는 나 자신과 진짜 나 사이의 간극이 있다고 말합니다 (52-56). 베드로가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오해했던 까닭은, 베드로의 정체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은혜 대신에 자신의 예수를 향한 헌신이라는 종교적 성취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야말로 예리한 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요나의 자기 정체성이 베드로의 이런 오해와 겹친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2장에서 바다로 떨어져서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는 독자들로 하여금 요나가 이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올바르게 가지게 되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만들지만 (그리고 어쩌면 요나 자신도 이제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헌신된 존재가 되었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이후 요나는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정체성이 여전히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위하는 민족신으로서의 야훼 하나님, 그리고 따라서 여타 민족들에게는 배타적으로 행하시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 기반한 것임을 자신의 하나님을 향한 분노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여기에는 요나가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요나가 붙잡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만을 위하시는 하나님이며, 따라서 인종 차별적이고 국가주의적인 하나님입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진짜로 누구인지는 정확히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느냐와 합치한다는 것입니다.

요나와 베드로의 진짜 속마음, 그들 자신도 알지 못했던 자신들의 마음이 성경 텍스트를 통해서 드러나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크게 두가지입니다. 첫번째는, 인간의 마음이 인간이 스스로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에서 작동한다는 것이며, 우리가 정말로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되는 것은 거의 항상 우리에게 닥친 위기 (즉 우리가 신뢰하고 붙잡고 있는 것들이 정말로 무엇인지 드러나게 만드는 위기)를 통해서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하나님의 은혜가 진짜 우리 존재를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우리가 점점 더 하나님의 은혜에 기반한 정체성(즉 바울이 고전 15:10에서 얘기하듯이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에서 성장하게 될 때 뿐이며, 이런 정체성의 변화는 요나와 베드로의 예에서 보듯이 단순히 외적으로 보이는 종교적 헌신으로는 판단하기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요나 이야기에서나, 성경의 다른 어떤 부분들에서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 사랑을 거저 주시며, 당신과 관계를 맺는 모든 이들에게 그 사랑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사랑이 자아 실현을 위한 거래(transaction)가 되어버린 시대 (150), 교회가 이웃을 사랑하기보다는 자기 안에 매몰되어만 가는 시대 (35), 그리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비춤으로써 세상에 드러내야 할 그 분의 형상인 그 분의 백성들이 여전히 요나처럼 교회 중심, 국가 중심, 혹은 다른 무언가를 중심에 놓고, 모든 사람을 그 자체로 가치 있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는 시대에, 사람에게 참 사랑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이며, 지금도 그 분의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참 사랑을 가르쳐주고자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아니 그 분 자체가 사랑이시기에 (요일 4:16) 그 분과 관계를 맺는 모든 이들은 점점 더 그 분의 사랑을 닮아갈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분의 백성들, 그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점점 더 깨달아가며, 그 분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자신들의 정체성을 얻는 자들은 어떤 종류의 배타주의적 우상도 경계합니다. 국가주의나 인종 차별 주의 뿐만 아니라, 실력 중심 주의, 학벌주의, 물질 만능주의, 소비주의 등등, 이 모든 것들은 켈러에 의하면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이 다른 이들보다 우월함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허상들이며, 우상들입니다. 우리가 그 분을 제대로 알게 되면 될수록 우리는 우리 주변의 이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됩니다. 아무도 차별하지 않게 되며,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능력에서 자라가게 됩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켈러는 이 부분을 얘기할 때 특히 예일의 신학자인 Miroslav Volf의 배제와 포용(Exclusion and Embrace)를 많이 언급합니다. 독자들도 참고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이상이 켈러가 요나서를 통해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제부터는 이미 말씀드렸듯이,  이 책에서 제가 좀 아쉬운 점을 세가지 얘기하겠습니다. 첫번째는 이 책에 반복이 많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켈러의 지적 성실성을 좀 의심하게 되는 대목입니다. 그러한 반복은 특히 10장과 11장에 몰려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배타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부분은 이미 “답이 되는 기독교”(Making Sense of God)에서 한 챕터를 할애해서 그가 자세하게 한 얘기들이며, 굳이 이렇게 똑같은 얘기를 반복할 필요가 있었나 싶습니다. 같은 주제에 대해서 다른 각도로, 다른 이야기들을 통해서 충분히 할 수 있었을텐데, 그리고 그렇게 다른 각도로의 접근이 분명히 신선함을 가져다 주었을 텐데, 좀 아쉬운 대목입니다. 두번째로 켈러의 구원론(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가)과 속죄론(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어떻게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는가) 사이의 간극이 좀 크다는 것입니다. 켈러는 구원론에 관한 한, 우리의 정체성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되는지에 집중합니다. 죄가 우리 삶에 가지게 되는 영향력은 크게 죄책, 수치, 공포라는 세가지 힘으로 나타나는데, 특히 정체성 담론과 관련해서 가장 영향력이 큰 죄의 힘은 수치입니다. 학자들이 얘기하는대로, 수치는 우리의 정체성을 직접적으로 깎아내리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그가 그리스도의 속죄론에 대해서 얘기할 때 자신의 죄 이해를 거의 배타적으로 죄책(guilt)의 해결에 한정시킵니다. 이런 한정은 사실 켈러가 짓는 것은 아닙니다. (켈러는 오히려 자신의 저서들 여기저기에서, 특히 센터 처치에서 자신의 속죄론과 구원론 사이에 일치될 여지를 남기는 설명들을 분명히 합니다. 아쉬운 것은, 그가 이런 명백한 간극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하는 시도를 별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오히려 그가 지지하는 속죄론인 the doctrine of penal substitutionary atonement(형벌적 대속론)가 전통적으로 죄책의 문제만을 다루는 것으로 이해되어져 왔다는 것이 더 크긴 합니다. 그러므로 켈러는 왜 자신이 이야기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이 주로 정체성에 집중하는 반면, 자신이 지지하는 속죄론이 오직 죄책만을 다루고 있는지에 대해서 추가적으로 설명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켈러의 구원론과 속죄론 사이의 간극의 핵심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주에 The Gospel Coalition 홈페이지에서 이미 이 책의 서평을 한 Hannah Anderson이 지적한 부분이 문제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Anderson은 켈러가 이야기하는 대속적 희생으로써의 사랑에 어느 정도 동감하면서도, 켈러가 관계에 있어서의 학대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별로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여전히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과 관계의 학대 사이의 차이를 명확하게 하는데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관련 서평 내용을 여기에 인용합니다. (독자 여러분들께서 직접 원문을 읽고 판단하시도록 하기 위해서 번역을 하지 않았습니다.)

Despite my profound appreciation for Keller and The Prodigal Prophet, I do have one point of concern. In discussing how God’s self-sacrificial love calls us to self-sacrificial love, Keller attempts to answer the objection that this teaching might enable abusive or exploitative relationships. He argues that this misunderstands the nature of self-giving love, countering that

[A]llowing someone to exploit you or sin against you is not loving them at all. . . . Some people do indeed allow themselves to be browbeaten and used, for many psychologically toxic reasons under the guise of being “self-giving.” In reality it is selfish, a way to feel superior or needed. To say that self-giving love must lead to abuse and oppression is to misunderstand it entirely. (149–50)

Keller is correct that we often misunderstand the nature of self-giving love and fail to see how it calls those we love to repentance. But just as often we misunderstand the nature and dynamics of abuse, including how abusers lure and trap their victims. And this is where Keller’s greatest strength—his ability to leave space for the reader’s own thought process—becomes a weakness when handling sensitive contemporary questions like abuse.

By relying on readers to “fill in the gaps,” Keller’s explanation is only as good as the individual reader’s knowledge of abuse dynamics. And given our general ignorance, readers are unlikely to distinguish between abusive relationships and codependent ones. It’s entirely possible they’ll read this paragraph as suggesting that those who suffer abuse somehow enable it out of a desire to “feel superior or needed.”

But Keller would never argue that those suffering under systemic racism or an unjust marketplace are at fault for “allowing” their oppressors to exploit or sin against them. Instead, he consistently argues that we must pursue justice, fight oppression, and free those captive to it. Within this book itself, Keller challenges those who attempt to transcend conversations about injustice and “simply preach the gospel.” Those who sit on the sidelines, he says, end up enabling injustice.

(Hannah Anderson, from the review of Tim Keller’s The Prodigal Prophet)

앤더슨의 논지가 제가 보기에는 꽤나 설득력이 있습니다. 켈러는 전통적인 형벌적 속죄론에 대한 변호를 잘하고 있지만, 그것이 현대 심리학이나 상담학에서 찾아낸 학대에 대한 통찰과 어떻게 잘 맞물리는지, 혹은 어떻게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지에 대해서 좀 더 설명을 했었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전반적으로 이 책은 켈러의 거의 모든 책들이 그렇듯이 굉장한 통찰을 주는 책이고, 여러분들이 저의 서평을 통해서 이 책을 더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셨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비판한 것들에 대해서도 실제로 책을 읽어보시고 과연 그런지를 확인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드셨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아마 제 서평은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서평 쓰는 남자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