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욱 선생님의 팀 켈러에 대한 생각 반박

페이스북 친구인 정한욱 선생님이 팀 켈러의 저서 6권을 읽고 느낀 점을 6가지로 정리해서 적어주셨습니다. 나름대로 반박할 부분도 있고, 정정하고 싶은 부분도 있고 해서, 선생님의 6가지 생각에 댓글 형식으로 제 생각을 좀 적어 보았습니다. 번호가 달린 문단들은 선생님의 생각들이고, 화살표가 달린 문단들은 제 답변과 생각들입니다.

팀 켈러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

  1. <탕부 하나님>의 마지막에 나오는 “신학적으로 건전하고 철저히 정통적이면서도 동시에 (지적으로 세련되고) 한결같이 은혜로운 상태가 가능하다”는 말이 그의 책과 사역의 지향점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톰 라이트를 자주 인용하지만 “전통적인 바울 이해와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새 관점에 동의하지는 않고, 선교적 교회 운동을 자세히 설명하지만 “이머징 교회나 에큐메니칼 운동, 칼 바르트와 관련이 있고, 정의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이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 보수주의자들에게 공감하며, 복음서를 강해하거나 정의라는 주제를 다루면서도 “보편적인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너무도 복잡한 주제여서 제한된 지면에 다룰 수 없다”는 이유로 하나님 나라 개념을 자신의 논의에 도입하는 것을 끝끝내 피합니다. 그러면서 “대속, 중보, 은혜를 통한 구원”과 같은 전통적인 교리만 가지고도 이 모든 주제들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지옥에 대한 생각은 정통신학보다 C.S. 루이스의 견해에 더 가까워 보이고, ‘창조과학’에 대해서도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네요!)

==> 켈러가 기존의 보수 기독교에서 벗어나지 않는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여러 예를 구체적으로 들어주셨습니다. 일단 켈러가 톰 라이트의 새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톰 라이트를 선택적으로 사용합니다. 그의 Preaching to the Heart 강연에서, 켈러는 자신이 갑상선 암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해 있었어야 할 때, 라이트의 부활에 대한 저작인 The Resurrection of the Son of God을 읽고 굉장한 감명을 받았다고 언급한 바 있고, 실제로 그의 설교에서도 톰 라이트를 꽤나 자주 언급합니다. 한편으로 톰 라이트를 비롯한 새 관점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국가적/공동체적 정체성 표지로서의 율법을 강조하는데, 켈러의 복음 설교에서는 서구의 개인주의적인 정체성에 맞서서 공동체적 정체성 표지에 대한 언급이 꽤나 자주 나타나며 (물론 켈러는 개인적 정체성과 공동체적 정체성을 모두 선택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선택적으로 배격하며, 복음에서 오는 정체성만이 그 둘 모두를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고 주장합니다.) 비록 직접적으로 켈러가 새 관점 학파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는 없을지라도, 논지의 흐름상 유사한 부분이 있다는 것은 꼭 언급되어야 할 듯 싶습니다.

또한 선교적 교회 운동을 설명하면서도 이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 보수주의자들에게 공감한다는 말이 켈러가 선교적 교회 운동을 나름대로 소화해서 지지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한욱 선생님이 이 부분은 너무 편파적으로 켈러의 센터 처치에서 켈러가 분명히 선교적 교회 운동의 필요성을 적시하고, 또 더 나아가서 자기 나름대로 선교적 교회 운동을 활용하고 있음에도 단순히 보수적인 사람들에게 “공감”했다는 이유로 마치 켈러가 선교적 교회 운동을 거부하거나 활용하지 않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를 언급하기를 피한다고 하셨는데, 이것도 공정한 판단이 아닙니다. 켈러는 센터 처치에서 게할더스 보스의 The Teaching of Jesus and the Kingdom of God이라는 책에 대해서 자세히 소개하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소개합니다. 아래에서도 계속 지적하겠지만, 정한욱 선생님이 센터 처치를 선택적으로 읽으셨다고 했는데, 여기에 지적하신 내용들 중 센터 처치를 제대로 읽으셨더라면 언급되지 않았을 내용들이 굉장히 많다는 것을 밝힙니다.

  1. 팀 켈러는 선하고 신실하며 지적일 뿐 아니라 균형 감각과 정의감까지 갖춘 훌륭한 목회자요 변증가인 것으로 보이지만, 김영민 선생님의 표현을 빌자면 “긴 다리로 물가를 노닐면서 물고기만 쪼아 먹는 학”과 같은 분이지, 결코 “아가미가 생길 때까지 ‘타자의 물’에 몸을 담그거나 익사의 공포를 뚫고 범람하는 타자의 강물 속으로 몸을 담글”분 같지는 않습니다. 상대를 향해 정면으로 돌진하며 관중들의 피를 뜨겁게 가열하는 인파이터라기보다는, 상대와의 거리를 유지한 채 툭툭 유효타를 던지면서 철저히 안전 위주로 경기를 운영하는 아웃복서 스타일이랄까요? 아직도 여성안수를 허용하지 않는 보수적 교단에 몸담고 있는 초대형교회의 목회자로서 어찌 보면 당연한 행보일 수 있겠습니다만, 관전자의 입장에서는 좀 답답해 보일 때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 어떤 기준에서 이런 판단을 하시는지에 대한 근거가 확실하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텍스트를 어떻게 보시고 이런 판단을 하시는 것인지를 밝혀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냥 인상 비평을 하신 것이라면 받아들이기가 어렵고요. 하나 더, 켈러가 속한 PCA 교단이 여성 안수를 허용하지 않는 것에 저도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그 자체가 마치 구시대적이고 악한 것인듯이 표현하시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사모님 되시는 캐시 켈러 사모님은 고든 콘웰 재학시에 자신 또한 안수를 받아 여성 목회자가 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왜 여성 안수를 반대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생각을 Jesus, Justice, and Gender Roles라는 책에서 잘 설명해 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성 안수에 관한 문제는 이미 켈러 목사님 부부가 여러 가지 면에서 생각을 했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면이라는 점에서 정 선생님께서 동의하지 않을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쉽게 “아직도 여성안수를 허용하지 않는”이라는 식으로 구시대적이며 뒤떨어졌다는 뉘앙스를 주시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1. 책을 읽어가며 가장 편안하지 않았던 부분은 ‘반성의 부재’였습니다. 이 부분은 비단 켈러뿐 아니라 미국의 복음주의권 저자들에게 전반적으로 느끼는 아쉬움이기도 합니다. 그는 서구 세속주의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확신에 찬 어조로 정통 기독교야말로 그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치료제(답이 되는 기독교)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그 ‘답이 되는’ 기독교는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것일까요? 노예제도와 인종차별과 식민주의를 하나님과 성경의 이름으로 지지했던 과거의 서구 백인교회를 말하는 것인가요? 지금도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그가 속한 미국의 보수장로교단을 말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트럼프에게 80%의 지지를 보냈다는 미국제 복음주의를 말하는 것인가요? 그가 그렇게도 강조하는 그 ‘건전하고 정통적인 신학’으로 빚어진 과거와 현재의 교회 중 도대체 어떤 교회가 그 답을 보여준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2. 물론 그는 과거와 현재의 ‘잘못된 기독교’에 대해 여기저기서 비판합니다. 그런데 ‘정통 기독교’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그의 비판은 적어도 제가 본 책에서는 두 문장 이상을 넘어가지 않습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과연 그 훌륭하다는 ‘답이 되는 기독교’는 그가 그렇게도 비판하는 ‘세속주의’와 ‘자유주의 신학’ 그리고 현대성에 ‘적응’ 하기 위해 분투하는 새로운 형태의 복음주의(예를 들어 이머징 교회)만큼 자신들의 잘못된 과거와 왜곡된 현재에 대한 치열하고 정직한 반성의 과정을 거쳤거나 거치고 있을까요? 세속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그가 인용하는 저자들 중 많은 분들이 ‘세속주의의 자식들’이라는 사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21세기의 다원적인 사회이자 세계역사의 변방인 한국에서 살아가는 저는 저자에게서 은연중 느껴지는 ‘좋았던 과거의 기독교 세계(christendom)’에 대한 향수와 나이브한 서구(미국) 중심주의가 그다지 편안하지 않습니다.

==> 3, 4번은 연결되어 있는 내용이기에 함께 답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두가지 판단 모두에 동의하지 않고요. 정황적인 이유에서, 그리고 켈러의 책이 보여주는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정황적인 이유를 먼저 들어보겠습니다. 켈러가 목회하는 맨하탄은 기독교에 적대적인 문화가 훨씬 더 강력하게 작용하는 지역입니다. 적어도 기독교에 무관심하거나, 나 몰라라 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지역입니다. 이런 지역에서 켈러가 기존의 기독교에 대한 나름의 반성이 없이 살아 남을 수 있었을까요? 글쎄요. 저는 켈러가 이미 어떤 면에서 사람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는지에 대해서 깊이 반성했고, 그런 면을 자신의 사역에 적용시킬 정도로 자세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추가적으로 정 선생님께서 상대적으로 가장 괜찮았다고 하신 “탕부 하나님“은 그 주된 목적이 켈러 나름대로 상황화시킨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누가복음의 탕자의 비유에서 큰 아들에 초점을 맞춘 것은 교회 안의 위선적인 문화를 고발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다고 켈러 스스로 탕부 하나님에서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즉 켈러가 탕부 하나님을 쓴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기존의 기독교에 대한 통렬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면을 제대로 보지 않으시고 반성이 없다고 하시는 것도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켈러가 어떤 논제에 대해서도 항상 중간 지점에 서서 자신의 입장이 가장 옳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면은 반성이 없어보인다는 지적을 들을 만한 여지를 만들어 준다는데 저도 동의합니다만, 켈러 신학 안에 기존의 복음주의 기독교에 대한 반성이 없다는 말은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다시 언급하지만, 정 선생님이 센터 처치를 제대로 정독하셨다면 3, 4번의 비판들은 나오지 않았을 비판이라고 생각합니다. 센터 처치의 상황화에 관한 챕터는 그 자체로 이제껏 기독교가 보여준 잘못들에 대한 깊은 반성을 요구합니다. 복음 메세지를 깊이 알고, 어떤 면에서 복음이 사람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 자체가 왜 사람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는지에 대한 반성을 선제적으로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센터 처치를 제대로 읽어 보시기를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1. 결론적으로 켈러는 여러 이유로 진보적인 신학을 수용할 수는 없지만, 현재의 상태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변화를 갈망하는 많은 목회자나 평신도들이 ‘심각한 위험’을 감수하거나 ‘지나친 모험’을 감행할 필요 없이 접근하기에 최적화된 저자 중 한분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전통적인 개혁주의 교리를 지적이고 세련되며 균형잡힌 방식으로 정황에 적실하게 풀어내는 그에게서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꼈지만, 애석하게도 ‘머리를 망치로 내리치는’ 충격이나 ‘존재의 심연을 직접 건드리는’ 심오함까지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한 시대를 풍미할 정도로 ‘좋은 저자’임에는 틀림없지만, 그의 멘토인 C.S. 루이스나 조나단 에드워드처럼 시대를 초월한 ‘최고의 저자’의 반열에 오르기에는 약간 부족해 보인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포지션에 대한 명민한 인식’이 그의 공부의 본질이자 성공의 비결이라는 한 페친의 견해에 동의하면서도, 어쩌면 바로 그 명민함이 그가 당대를 넘어 오랫동안 기억될 저자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이 부분은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아무리 켈러가 적실한 얘기를 제대로 풀어내고 있다고 해도,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하루에 12시간이 넘게 공부와 연구에만 투자할 수 있었던 사람도 아니고, C.S. Lewis처럼 전문적인 학자도 아닙니다. 그렇기에 실제 목회 현장에서 써 먹을 수 있는 것들, 먹히는 것들에 초점을 맞추고 책을 쓰고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망치로 머리를 내려치는 충격이나 존재의 심연을 건드리는 심오함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상 켈러는 탁월한 소통가이자 목회자라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켈러가 보여주는 탁월한 점은 그가 교리의 언어와 인간의 감정을 연결시키는 시도를 대담하게 (그런 시도를 했던 대표적 인물이 개신교 자유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슐라이어마허라는 점을 고려할 때) 하고 있다는 점이며, 또 교리 언어가 가진 문턱을 신앙이 전혀 없는 사람들도 이해할 정도로 낮추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입니다. 그런 면에서 켈러의 소통과 연결의 철학은 심오한 깊이를 가진 신학자들이 쉽게 해낼 수 없는 부분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내게 해주었다고 봅니다. 이 부분은 저 나름대로 더 깊이 풀어낼 계획입니다. 이후에 나오게 될 글이나 강의를 기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1. 현재의 제 관심은 세계기독교입니다. 팀 켈러는 존경할 만한 목회자요 탁월한 변증가이자 신실한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가 서 있는 자리는 제가 떠나고 싶어하는 바로 그 자리인 것 같습니다. 지금 제게 와 닿는 말은 켈러의 “답이 되는 기독교”보다, “기독교의 모든 교회적 ‧ 신학적 ‧ 도덕적 범주는 역사적이고 상황적이지만 동시에 참다운 기독교 진리에 온전히 참여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역사는 모든 시대의 족속과 민족 그리고 교회를 포함하는 “세계기독교”의 관점에서 서술되어야 한다”는 복음주의 역사신학자 마크 놀의 말과 “나는 이제 나 자신의 교회 내에서만, 나 자신의 땅 위에서만 신학하지 않고,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신학하기를 시작했다. 나의 뿌리는 개혁교회이지만, 나의 미래는 하나의 교회다”라는 거장 위르겐 몰트만의 말입니다.

==> 센터 처치의 상황화에 관한 챕터를 읽으셨더라면, 그리고 City to City의 활동을 알고 계신다면 켈러에 대해서 이런 비판은 별로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시시라 생각합니다. 켈러는 상황화를 굉장히 강조하는 목회자이고, 자신이 처한 서구적 상황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목회자입니다. 상황화에 대한 강조가 그런 면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그가 세우는데 기여한 City to City는 세계 곳곳에서 교회를 개척하려는 사람들을 지원하고, 말씀하신 세계 기독교를 펼쳐가려는 사람들에게 각각이 처한 상황에 가장 적절한 복음의 상황화를 이루어가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위의 비판과 연결되는 지점이긴 하지만, 저는 어떤 면에서 정 선생님께서 켈러가 서구 중심적이며 기독교 왕국을 그리워한다는 인상을 받으신 것인지 여전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서평 쓰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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