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를 (좋아하는 나를) 위한 변명

팀 켈러를 (좋아하는 나를) 위한 변명

팀 켈러는 자신의 멘토로 4명을 꼽는다. 마틴 로이드 존스, 존 스토트, 고든콘웰 시절 교수였던 리차드 러블리스(와 조나단 에드워즈), 그리고 웨스트 민스터 시절 교수였던 에드문드 클라우니이다.

그 중에서 팀 켈러는 자신이 처음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마치 아기 오리가 알에서 깨어나서 처음 본 대상을 무작정 쫓아다니듯이 쫓아다녔던 인물이 존 스토트였다고 말한다.

나에게는 팀 켈러가 그런 인물이었다. 팀 켈러의 존 스토트같은.

팀 켈러같은 대중 목회자를 왜 그렇게 좋아하냐는 얘기를 반복적으로 듣는다. 팀 켈러는 대중 목회자를 넘어서는 인물이다. 그의 책을 읽어보고 강의를 들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에게는 단순한 대중적 목회자가 가지기 어려운 1. 인간에 대한 심오한 이해, 그리고 2.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인간 변혁의 큰 그림, 3. 문화에 대한 이해, 그리고 4.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문화 변혁의 큰 그림이 있다.

나는 팀 켈러 덕분에 목회를 제대로 하고 사역을 제대로 하고 신학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팀 켈러 만큼의 성숙한 인간 이해나 문화 이해 정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계속해서 내가 사는 맥락 속에서 1.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2. 문화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것만 해도 나에게는 큰 수확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 켈러에게도 한계는 있다. 그가 속한 문화적, 시대적 맥락이 그가 가진 한계일 것이다. 역설적인 것은, 팀 켈러를 철저하게 읽지 않고는 팀 켈러의 한계를 파악할 수도, 넘어설 수도 없다는 것이다. 팀 켈러를 제대로 읽지도 않았으면서 겉으로 보이는 인상으로 그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섣부른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얘기이다. 누군가를 제대로 알려면 그 사람의 말과 글을 들어보고 살펴봐야 한다.

나는 이제 팀 켈러가 가진 한계를 조금씩 이해하고 보게 되어가는 중이다. 명예-수치 문화권에 대한 내 관심과 추구는 켈러가 가진 한계를 넘어보려는 내 첫 번째 시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시도 조차도 나는 켈러가 던지는 질문 속에서 보고 있음을 안다. 한마디로 켈러는 나로 하여금 신학 전체를 조망하는 관점을 가지게 해 주었고, 나는 켈러가 보았던 것들, 그가 물었던 질문들에 내가 보는 것들과 새롭게 묻게 된 것들을 쌓아나간다.

난 그게 신학하는 방법이며 신학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팀 켈러 시리즈

서평 쓰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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