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

예배의 중요성! 예배의 중요성?—제임스 스미스의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

“여기 약간은 이상한 진리가 또 하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무신론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숭배할지를 자유롭게 정할 수 있을 뿐, 아무것도 숭배하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어쩌면 종교를 가지는게 가장 나은 형태의 숭배일지도 몰라요. 왜냐하면 그 외 다른 것을 숭배하는 순간 인간은 불행해지기 때문입니다. 돈과 재화를 숭배한다면, 많은 부를 쌓는 것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믿는다면, 충분히 소유한 인생은 영원히 불가능할 겁니다. 외모와 미모, 성적인 매력을 숭배하면 영원히 아름답지 못 할거에요. 얼굴에 주름이 늘어날 때마다 실제로 숨이 끊어지기도 전에 몇번이나 죽음을 느끼며 살겠죠. 우린 이런 사실을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수많은 속담, 우화, 신화를 통해 들어온 교훈이니까요. 하지만 중요한건 이 교훈을 사소한 일상 속에서도 인지하고 기억해낼 수 있느냐 입니다.

힘을 숭배하는 자는 남보다 강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권력을 추구합니다. 그게 오히려 내면의 두려움을 키운다는걸 인지하지 못한 채요. 지성과 똑똑해보이는 것을 숭배하는 자는 끊임없이 아는 체를 합니다. 잘 모르는 것도 아는 것처럼 말하는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리죠. 이런 숭배는, 도덕적인 옳고 그름을 떠나, 자기 자신에게 매우 해롭습니다. 나도 모르는 새에 나를 지배하는 기본 설정값이 되어 나를 편협하게 만들고 나의 가치관을 고정시켜 버리기 때문이죠.”

David Foster Wallace, 이것이 물이다(This is Water)-

 제임스 스미스의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Desiring the Kingdom)가 2009년에 처음 나왔을 때, 저는 막 신대원에서 M.Div와 M.A. 과정을 마치고 조직 신학으로 Th.M. 과정을 시작하기 위해서 Boston College의 School of Theology and Ministry에 지원해놓고 입학을 기다리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지금은 가장 좋아하게 되었고, 개인적으로 신학적으로, 사역적으로 가장 영향을 크게 받은 팀 켈러에 대해서 깊이 파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또한 그 때입니다. 당시 제가 팀 켈러(Tim Keller)에게 반했던 것은, 그가 사람이 어떻게 해야 변하는지를 설교라는 관점에서, 복음 선포라는 관점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와 C.S. Lewis같은 인물들의 통찰을 통해서 정확하게 짚어냈고, 또 그러한 통찰들을 가지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통해서 저 스스로가 개인적인 변화를 수차례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켈러에 의하면, 사람이 변하는 것은 설교자가 청중의 감정에 호소할 때에도 (마치 열정적인 찬양 인도가 순간적으로 사람들의 감정을 극도로 끌어올리고, 마치 그 순간에는 예수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듯이 인도하지만, 결국 그 감정이 사라지고 나면 나중에는 아무런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것처럼), 지성에 호소할 때에도 (엄청난 설득력과 놀라운 지식으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지만,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지식을 추구하게 만들 뿐, 그들의 내면과 관계의 변화를 이끌어 내지는 못하는 것처럼), 의지에 호소할 때에도 (왜 예수를 위해서 죽지 못하는가. 여러분은 왜 그렇게 못하는 지를 돌아봐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고, 결국 선천적으로 의지가 강한 사람들에게 교만함만을 심어주게 되는) 아닙니다. 오직 구약 성경이 레브(leib)라고 부르고, 신약 성경이 카디아(kardia)라고 부르는,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 동기와 욕망의 근원이 자리하고 있는 마음(heart)에 호소할 때에만,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할 때에만 사람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이란, 단순히 일회적이고 순간적인 찰나의 즐거움이 아니라, 내 몸이 움직이는 방향을 조종하고, 내 의지를 일으키며, 내가 살아갈 이유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에 발췌한 데이빗 포스터 월레스의 연설에는 인간 존재에 대한 굉장한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욕망의 대상이란 결국 내가 가장 숭배하는 것, 오늘 소개할 제임스 스미스 식으로 표현하자면 내 예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스미스의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는 그런 면에서 아주 의미있는 책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팀 켈러의 설교와 책들을 읽으면서 팀 켈러의 마음의 신학(a theology of the heart)에 대한 철학적인 근거를 좀 더 밝히 보여주었던 책이어서 의미가 깊었고, 또 이 책을 접하게 될 독자들에게도 자신의 삶을 이끌어가는 근본적인 욕망과 동기를 돌아볼 수 있게 해줄 수 있기에 종교가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를 떠나서 아주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의 논지는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책은 전체 2부, 총 6장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1장부터 3장까지가 1부, 4장부터 6장까지가 2부입니다. 1부에서는 일반론적으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탐구합니다. 인간은 무언가를 숭배하는, 예전적인(liturgical) 동물이라고 결론 짓고, 세속 문화의 예전들을 분석합니다. 2부에서는 그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기독교 예전의 실천들이 어떻게 그러한 세속문화의 예전들에 역으로 작용하는 예전이 될 수 있는지를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기독교 대학의 교육이 어떻게 이런 예전적인 교육을 지향하는 장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제안을 하면서 책을 마칩니다. 이 책이 전체 3부작 중에서 1부에 해당하기에 스미스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서 책을 읽으면 1부의 마지막이 좀 감질맛나게 느껴지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을 겁니다.

어쨌든, 1장에서는 이전까지 서구 세계를 지배해왔던 데카르트를 위시한 계몽주의와 현대성이 주장하는대로, 생각하는 동물로서의 인간이라는 관점이 인간을 마치 합리적인 지식과 정보만 주어지면 충분히 마음먹은대로 변화할 수 있는 주장을 하기 때문에, 또한 몸의 습관으로 터득된 지식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에 맞지 않다고 비판합니다. 그 이후에는 기독교 내에서 인간을 이해하는데 지배적으로 쓰여왔던 틀인 믿음과 신뢰하는 동물로서의 인간이라는 관점 또한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고, 따라서 공동체 안에서 형성되어지는 인간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측면에서 인간이 처한 현실을 잘 반영하지 못한 인간 이해라고 분석합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인간 이해가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에 가장 잘 부합하는 관점일까요? 스미스는 인간은 무언가를 예배하고 숭배하는 동물이라는 관점이 가장 합당하다고 말하면서, 가장 최근의 철학적 통찰들을 끌어 들여서 우리가 가장 사랑하고 숭배하는 것이 우리 존재의 전부를 설득하고 (이성, 합리성), 우리가 그 방향으로 계속해서 노력하도록 이끌며 (의지), 또 무엇보다도 그것을 가장 아름답고 추구할 만한 것이라고 느끼도록 만든다고 말합니다 (감정). 이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관장하는 부분을 조나단 에드워즈는 정서 혹은 정동(affection)이라고 불렀고, 스미스 또한 인간을 이런 면에서 affective animal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주장합니다. 즉 인간을 이끄는 주된 중심 동기는 사랑이며, 특별히 그가 가장 아름답고 합리적이며, 시간을 들여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것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단순히 지식의 습득이나 신뢰를 통해서 인간 안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인간의 몸 전체를 그 사랑을 추구하는 환경으로, 그리고 그 방향으로 노출시키면서 반복적인 실천을 통해서 습관이 형성되면서 사람 안에서 강력하게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스미스는 이렇게 우리가 사랑을 바칠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목표, 이상, 목적이 되는 것을 왕국(the kingdom)이라고 표현했고,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왕국을 욕망함(desiring the kingdom)”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책의 한국어 제목은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이고, 스미스가 궁극적으로 주문하는 바도 그것이기는 하지만, 제목은 중의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신이 가장 바라고 꿈꾸는 것을 욕망함을 통해서만 삶을 영위하는 존재라는 통찰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2장과 3장은 1장에서 분석한 인간 이해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왜 이런 인간 이해가 예전적(liturgical)인 관점에 잘 맞아 떨어지는 지를 설득한 후에, 세속 문화의 어떤 부분들이 이런 인간 이해로 풀리는지를 보여주는데 주안점을 둡니다. 2장에서 스미스는 예전(liturgy)을 궁극적인 관심사에 대한 의식(rituals of ultimate concern, 86)이라고 정의내립니다. 그리고 이후에 쇼핑몰,  애국주의 등에 드러나는 예전적인 측면을 꽤 설득력 있게 분석합니다. 스미스는 쇼핑몰의 광고판에 걸린 제품 광고에 나오는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단적인 예로 들면서 (19-22), 그 제품을 소비하면 이 사진에 나오는 것처럼 행복한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욕구를 광고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지게 만들고, 그렇게 해서 소비주의를 부추긴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왕국(the kingdom)이란 행복을 누리는 것이 되고, 행복을 위해서 사랑해야 하고 추구해야 하는 것은 소비입니다. 쇼핑몰이라는 사원(temple)에서 소비를 실천하면서 느끼게 되는 찰나의 즐거움은 결국 바라고 꿈꾸는 행복(한 가족)이 소비가 몸에 배면 밸수록 더 가까워질 것이라고 믿게 만들면서 소비주의가 몸에 배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1장에서 스미스가 했던 얘기와 잘 맞아 떨어지는 분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인용한 데이빗 포스터 월레스의 숭배하는 인간이라는 관점을 생각하면 아마 더 잘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2부는 1부보다는 내용이 아주 어렵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설명도 짧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4장에서는 예전적인 관점에서의 세상에 대한 이해를 성례적인 (sacramental) 차원에서 접근하면서 좀 더 신학적으로 접근합니다. 4장에서 그런 작업들을 하면서 기독교 전통이 바라보는 성례적인 차원에서의 피조계를 다루고, 그를 바탕으로 해서 5장에서는 기독교 예전의 실천들인 성찬이나 세례, 헌금 등이 가진 예전적인 함의와 그런 실천들을 통해서 우리의 근본적인 욕망들이 예수를 바라는 쪽으로 어떻게 옮겨가게 되는지에 대해서 다룹니다. 마지막으로 6장에서는 1장부터 5장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기존의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인지적인 관점에 치중하는 기독교 대학의 교육이 어떻게 예전적인 차원으로 바뀔 수 있을지에 대해서 스미스 나름의 제안을 하고 마칩니다.

책은 전체적으로 이미 설명했다시피 논지가 분명하고,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어렵게 흘러갈 수 있는 내용임에도 그 흐름을 따라가기도 어렵지 않습니다. 제가 이 책을 2009년에 처음 읽었을 당시에는, 이미 말씀드린대로 켈러의 “마음의 신학”을 자세히 공부하면서 이 책이 제공하는 철학적 관점을 통해서 좀 더 튼튼한 근거를 얻을 수 있었기에 저에게 아주 유익했던 책이었고요. 하지만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책이 약간 균형을 잃은 면이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평을 마치기 전에 그런 부분 두 가지에 대해서 짧게나마 다루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부분은 제가 논문을 쓰는 분야와 관련이 있습니다. 바로 교리를 바라보는, 그리고 복음이 사람의 삶에 작용하는 방식을 바라보는 스미스의 시각에 관한 것입니다.

첫번째로, 스미스는 교리를 인지적인 차원에 가두어두고, 기독교 세계관이 오직 인지적인 생각의 차원에서 다루어지듯이, 교리 또한 그 일부분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리가 반드시 생각의 차원에서, 그리고 인지적인 차원에서만 다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미스가 자신의 논지를 펼치기 위해서 아주 비중있게 활용하고 있는 캐나다의 철학자 찰스 테일러의 사회적 상상(social imaginary)이라는 차원에서도 다룰 수가 있습니다. 테일러는 사회적 상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사회적 상상과 사회이론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들이 존재한다. 내가 ‘상상’이라는 용어를 쓰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내 논의의 초점이 바로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환경을 ‘상상하는’ 방식에 맞춰져 있으며, 이는 이론적인 용어로 표현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이미지와 이야기, 그리고 전설 속에 담겨 있다.

찰스 테일러, 근대의 사회적 상상(Modern Social Imaginaries), 43

테일러에 의하면, 사회적 상상이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이야기나 이미지, 전설 등으로 그들의 삶의 실천을 움직이고 이끄는 실천적인 토대입니다. 제 논문 프로젝트가 놓인 시금석이 바로 기독교 교리가 이렇게 일종의 사회적 상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캐빈 밴후저(Kevin Vanhoozer) 또한 그의 교리에 관한 저작들에서, 특별히 Faith Speaking Understanding에서 이미 많이 했던 얘기입니다.) 사실 계몽주의 이후 현대 사회에서만이 기독교 교리를 실제로 가리키는 지시물(referent)가 없는 언어, 삶과 연관이 없으며, 따라서 의미없는 종교적인 언어로 비춰져 왔을 뿐이지, 기독교 교리는 교회사 2000년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사람들의 사회적 상상을 자극해 왔을 뿐 아니라, 지금도 충분히 그런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스미스의 이 책에서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스미스가 분명히 5장에서 예전적 실천에 대해서 다룰 때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교리의 내용을 가지고 풀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부에서, 특별히 1-2장에서 교리를 다룰 때 마치 교리가 단순한 명제적인 생각만을 담고 있는 것같은 인상을 줌으로써 교리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은연 중에 강화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로서는 이런 부분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서 논문을 쓰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미묘한 모순이 스미스의 논지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또 하나 제가 지적해야 할 부분은, 스미스가 몸의 지식, 습관의 형성, 그리고 마음 등과 같이 우리의 주체적 노력만으로는 제대로 형성되지 않는 부분을 주제로 삼고 이야기를 하다보니, 인간이 가진 주체성을 상대적으로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스미스는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인간의 능력이 습관의 형성이나 인간 변혁에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해서 언급하기는 합니다. 다만, 신조(the creed)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에서 매우 짧게 언급합니다. (신조는 말 그대로 역사적 기독교가 붙잡고 있는 핵심 교리들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복음이 어떻게 사람을 바꾸는지에 대한 원리를 베드로의 위선을 고발할 때 드러내 보여줍니다. 그리고 바울이 보여주는 복음적인 변혁의 원리에는 합리적인 사고의 능력이 아주 중요합니다.

갈라디아서 2:14에서 바울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바울은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야고보와 그 동료들이 몰아 닥치자 그들이 자신에게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한다고 비난할 것이 두려워 자리를 피하게 되는데, 그 때 바울은 베드로에게 “너의 이런 행동이 잘못이다”라고 말하기보다는, “네가 복음이 말하는 바와 일치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얘기할 때 바울의 의도는, 단지 베드로가 도덕적이거나 율법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일을 했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경계를 이미 무너뜨리신 것을 생각해본다면 (즉 복음이 가진 함의를 깊이 생각해 본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삶에 하신 일에 대해서 깊이 묵상해 본다면), 베드로가 사람이 두려워서 복음이 가르치고 있고, 함의하고 있는 바에 일치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 문제가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덕적이고 당위적인 명령이라기 보다는, 베드로로 하여금 복음을 깊이 묵상해보고, 하나님의 행하심에서부터 베드로 자신의 행동을 반추해보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적 변혁에는 분명히 사람이 주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신 일과 그 일이 우리 각자의 삶에 가지는 함의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봐야 하는 면이 있는데, 스미스는 이미 언급한대로 이런 면을 상대적으로 너무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덜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실천 신학자의 관점에서 보면 스미스가 기독교의 예전적 실천이 가진 함의를 설명할 때 너무 당위적인 면, 즉 세례나 성찬에 참여하면 신학적으로 (이론적으로) 이런 유익이 있다는 면을 강조하는 것이 조금 아쉽습니다. 실제로 세례나 성찬에 참여하는 이들이 그런 유익을 누리고 있느냐는 질문이 더 중요한 질문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세례나 성찬, 헌금이라는 실천을 통해서 그런 유익을 누릴 수 있게 만들어주느냐가 되야 할텐데, 스미스는 아무래도 실천 신학자가 아니다보니, 또 실제로 교회 공동체들에 찾아가서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고 그들이 이런 예전적 실천을 통해서 누리는 유익이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조사할 학문적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보니, 너무 당위적인 면만 얘기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미스의 이 책은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밝히 보여준다는 면에서, 또 예전적인 관점에서의 기독교 교육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준다는 면에서, 굉장히 탁월한 책이라고 생각하며, 저는 이제껏 언급한 여러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이 책을 자주 참고하게 될 것 같습니다.

서평 쓰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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