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계시록 책임 있는 자세로 읽기

공포와 심판(Fear and Judgment), 그리고 시민 종교(civil religion)

요한 계시록을 그 장르와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아무 것도 모르는 일반인이 읽었을 때 가장 먼저 나오게 되는 반응은 공포 아닐까 싶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요한 계시록이 말하는 이야기는 세상과 그 마지막에 관한 것이며, 세상에 대한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요한 계시록을 현대적 사건과 미래에 일어날 일들과 직접적으로 연결시켜서 해석하는 여러 작가나 저자들, 심지어 학파들은 대중의 그러한 공포를 합리적인 것으로 설득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마이클 고먼의 요한 계시록 책임 있는 자세로 읽기(Reading Revelation Responsibly)는 미국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의 요한 계시록 읽기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심판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불러 일으켰고, 따라서 공포를 더욱 불러일으키는 방향으로 잘못 나갔고, 어떻게 그런 잘못된 읽기를 바로 잡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나름의 답을 제공하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책입니다. 다만 그 답이 얼마나 적실성 있고 설득력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이 책이 가진 특징은 미국이라는 국가 체계를 하나님께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도구로서 이해하는 시민 종교 전통이 요한 계시록을 오해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주장하는 부분이 두드러집니다. (고먼이 미국 상황에서 계시록 읽기의 오류를 잡아낸 중요한 해석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이 서평에서는 왜 요한 계시록이 공포의 책이 되었는지, 계시록에 담긴 하나님의 심판을 어떻게 이해해야 그러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민 종교가 어떻게 그러한 공포와 심판의 메커니즘의 도구로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고먼의 통찰에 대해서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계시록에는 공포를 조장할 만한 여러가지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용, 음녀, 짐승, 죽임을 당한 두 증인, 인과 나팔과 대접을 통한 심판, 그리고 그 심판이 펼쳐지는 장면에 대한 묘사, 이 모든 것들은 계시록이 묵시 문학이며 예언서인 동시에 서신서라는 세 가지 장르를 모두 포함하는 책이며, 따라서 그러한 장르에 맞게 읽어야 한다는 (이미 앞의 서평들에서 얘기했던) 원칙이 없이 읽는다면 저절로 우리를 공포스럽게 만듭니다. 미래에 저런 일들이 펼쳐질 거라고 상상을 한다면 누가 공포에 떨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우리의 감정적 반응과는 달리, 요한은 일차 독자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더욱 굳건히 붙잡으라는 확신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계시록을 썼습니다. 그렇다면, 21세기 독자들인 우리의 반응과 계시록의 1차 독자들의 반응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밖에 볼 수 없지요. 따라서 우리가 요한 계시록을 읽으면서 공포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계시록을 잘못 읽고 있다는 반증일 수 있는 거고요. 요한 계시록의 숫자 사용과 그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도록 하지요.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는 666이 있을 겁니다. 계시록 1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륙이니  (계 13:18)

계시록 13장의 맥락은 두 짐승 중에서 땅에서 나온 짐승이 하고 있는 일에 관한 묘사입니다. 666이라는 숫자와 아울러서 현대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된 것은 앞의 16-17절에서

저가 모든 작은 자나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표를 가진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표는 짐승의 이름이나 이름의

라고 얘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앞으로 세계 통합 정부가 구성되어 모든 사람들의 피부에 주민등록증 대용의 베리칩을 새겨 넣고 그 칩이 없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사고 팔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소문과 함께 대대적으로 퍼졌습니다. 당장 구글에 베리칩으로 검색을 해보면 뜨는 기사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은 사람들이 계시록을 읽으면서 가졌던 공포를 현실에 투영해서 배가되는 공포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고먼은 이런 공포가 계시록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일단 1차 독자들의 입장에서 666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첫번째로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게 한다는 것은 신명기 6장 4-6절에 나오는 “쉐마”에 대한 반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명기의 쉐마 본문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그것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신 6:4-8)

즉, 다시 말하면, 짐승의 표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지 않고, 세상의 원리와 원칙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가리키는 것일 뿐, 어떤 외적인 칩을 이마에 새겨 넣거나 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고먼은 666이라는 숫자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게마트리아(Gematria)라는 고대의 문자-숫자 변환 체계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666은 일차적으로는 네로 황제를 가리킨다는 것이 학계의 지배적인 주장이며, 고먼이 설명하는 바입니다. 왜 그럴까요? 네로의 헬라 이름인 neron kaisar는 히브리어로 음역하면 NRWN QSR로 바뀌는데, 각 글자에 배당된 숫자적 가치를 합하면 666이 된다는 것입니다. (N=50, R=200, W=6, N=50, Q=100, S=60, R=200). 곧 요한은 그 당시 신으로 군림했으며, 숭배와 예배를 요구했던 황제를 배격하고, 그리스도만을 예배드리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666을 이런 문맥적 이해 없이 다른 무언가로 이해하는 것은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왜곡하는 것이 됩니다. 오히려 고먼에 따르면 요한은 네로가 그러했듯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떤 독자적인 충성와 헌신을 요구하는 어떤 기관이나 개인도 네로와 같은 짐승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얘기하겠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것을 국가주의(국가에 대한 맹목적 충성과 헌신을 요구하는 사조)에 대한 복음적 신앙의 반박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먼은 이런 게마트리아 시스템을 따라서 여러 현대 정치 지도자들의 이름이 666으로 변환되며(예. Hitler, a=100, b=101, c=102 이런 식으로 간다고 보았을 때 히틀러의 이름은 666이 됩니다. 그 외에도 Henry Kissinger, Ronald Reagon, Bill Clinton 등등 많습니다), 따라서 그들을 적그리스도로 보는 해석이 계속적으로 있어왔고, 이런 해석은 또 다시 사람들에게 심판에 대한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특정 인물을 짐승이나 적 그리스도라고 보면서 공포를 불어일으키는 것은 요한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우리는 특정한 정치 체제나 지도자에게 무조건적으로 헌신하려는 태도를 지양해야 합니다 (한국적 맥락에서 보면, 이 대목에서 박근혜의 박사모와 어버이 연합, 그리고 보수적 기독교의 목사와 지도자들이 떠오르는 것은 지나친 읽기일까요?)

그렇다면 이런 공포라는 반응을 낳는 주원인이 되는 요한 계시록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라는 것이 다음 질문이 됩니다. 고먼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한 챕터를 할애합니다. 그리고 고먼이 주장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교회 공동체가 그 자신의 소명을 알고 그 소명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의 네가지가 고먼이 주장하는 계시록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는 원리입니다. 그리고 고먼에 의하면, 이 원리들을 따라서 계시록을 읽는다면, 대중들이 맞닥뜨리는 비합리적인 공포를 피하고, 요한 계시록 원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확장시켜서 21세기 상황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심판은 계시록 4장과 5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어린 양 되심과 충돌하지 않는다. à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희생과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선포라는 맥락 하에서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계시록의 그 모든 이야기들이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고먼은 굉장히 잔인한 이미지가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계시록 19장의 백마 탄 자가 “전투”처럼 보이는 사건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19:13에서 “그가 피뿌린 옷을 입었는데”라고 하는 대목에 주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고먼의 해석은 이 대목에서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시는 심판은 폭력적 전투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즉 당신의 피묻은 십자가의 희생을 통한 말씀의 검 (왜냐하면 같은 장 15절에서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라고 표현하고 있기에)을 통한 악한 세력에의 정복이라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심판은 그 자체로 목적이라기 보다는, 목적을 이루는 수단적인 성격이 강하다.

à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아울러, 고먼이 바라보는 하나님의 심판과 인간의 죄의 결과가 마치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라는 표현에도 어느 정도는 동의합니다. 이런 관점은 하나님의 심판 안에 담긴 폭력적인 이미지를 어느 정도 순화시켜주는 효과가 있기는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가나안인들에 대한 학살을 우리가 현대 문화 친화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굉장한 어려움을 겪고 있듯이, 요한 계시록 안에 담긴 폭력적 이미지를 어느 정도까지 이런 해석적 장치로 순화시킬 수 있을까요. 저는 약간 회의적입니다.

  1. 하나님의 심판에 나오는 심상들과 이미지들은 문자적 현실이라기 보다는, 상징적인 성격이 강하다. à 2번에 대한 저의 코멘트로 대신합니다.
  1.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기록은 세상을 향한 것이라기 보다는, 교회를 향한 것이다. à 이 말은 교회로 하여금 준비하고 대비하라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기록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100% 보호를 보장받지는 않습니다. 비근한 예로, 계시록 12장의 두 증인은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에게 죽임을 당합니다만, 곧바로 삼일 반이 지나서 다시 부활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이렇게 진행될 것이며, 결코 믿는 자들을 육체적인 고난이나 핍박에서 피하게 하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고먼의 해석에 동의합니다.

고먼 또한 어느 정도는 동의하리라 생각합니다만, 저는 요한 계시록이 성도들을 위로할 때 그들에게 아무런 고난과 핍박, 박해가 없으리라는 약속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소망이 있으니 현재의 고난과 고통을 견디라는 용기를 북돋워 주는 책이 요한 계시록이라고 생각하며, 이렇게 보면 사실 대다수의 대중들이 공포라는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하고 비교할 때 현상적으로는 바뀐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전히 성도들은 어려운 시대를 통과하게 될 것이며, 어떤 특별한 보호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에게는 최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승리하실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졌기에, 성도들은 그 약속에 마음을 두고, 눈 앞의 현실에 마음을 둠으로써 심판의 공포에 빠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계시록에 나오는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주된 요지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온갖 끼워 맞추기로 계시록의 기록들을 통해서 사람들을 심판에 대한 공포로 몰아넣는 식의 읽기는 제대로 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지양해야 합니다. Left Behind 식의 종말에 대한 읽기 또한 계시록을 제대로 읽는 사람이라면 지양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먼의 요한 계시록 읽기가 가진 장점 중에 하나는 미국의 시민 종교(더 나아가서 한국의 시민 종교, 혹은 국가주의에 호소하는 종교 세력)에 대한 분석 또한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대목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미 얘기한대로, 요한 계시록의 주된 경고 중 하나는 국가주의에 대한 경계입니다. 하지만 고먼은 미국의 경우, 건국 자체가 기독교적인 색채를 많이 띠고 이루어졌기에, 어떤 것이 신앙이고 어떤 것이 국가주의인지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고먼은 이런 예를 듭니다.

-전쟁이 “mission”으로 표현되는 것.

-군인으로서 싸우는 것이 성스러운 의무로 묘사되는 것

-God Bless America같은 문구들.

-국가 기도의 날(National Day of Prayer) (한국에도 국가 조찬 기도회가 있지요.)

-애국심과 신앙심의 미묘한 일치 (미국의 건국 이념에 호소하면서)

-국가로서의 미국의 사명이 세계 평화 유지와 진작이라고 이해하는 것 (그 자체라기 보다는, 거기에 담긴 아주 미묘한 기독교적 호소) (사실 미국은 철저히 국제 관계 속에서 미국이라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활동할 뿐인데 말이죠.)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용어들을 미국에 그대로 적용해서 부르는 것 (예. 세상의 빛, 혹은 언덕 위의 도시 등)

미국이라는 국가를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세상 속에서 이루는 도구라고 은연 중에 생각하게 되면, 미국은 자연스럽게 계시록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게 되고, 이것은 저절로 타국을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국가로 악마화하거나, 혹은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지배 체계를 채택하는 국가들에 대한 악마화로 이어지게 됩니다. 비근한 예로 공산주의를 사단과 악마의 사상이라고 비하하는 것이 있을 겁니다. 사실 공산주의가 실패한 사상이고,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상이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사단의 사상이라고 불릴만큼 자본주의와 비교할 때 악하냐라는 질문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고, 그것은 여타의 정치 사조들도 마찬가지이죠. 요는, 국가로서의 미국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라는 생각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착각한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이라는 국가를 높이는 국가주의를 하나님을 높이는 것으로 착각할 확률이 높고, 고먼은 바로 정확히 그 부분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요한 계시록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도 하고요. 따라서 앞에서 제가 부각시켰던 공포와 심판이라는 주제는, 어찌 보면 국가주의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공포와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 택한 방식 중의 하나가 미국이라는 국가를 하나님의 뜻 아래 있다고 보고, 자신들이 미국을 지지하는 이상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고, 따라서 공포를 맞닥뜨리지 않아도 된다고 은연 중에 생각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먼은 이렇게까지 생각을 발전시키지는 않았습니다만, 고먼의 주장을 잘 조합해보면 충분히 이런 생각의 발전이 가능하며, 이런 생각의 흐름은 앞으로도 더욱 발전시켜야 할 부분이라고 봅니다. 한국적 상황에서도 근래 박사모와 보수 기독교가 하나가 되어 건국의 초대 국부를 이승만으로 만들면서 교묘하게 대한민국의 건립이 기독교 신앙과 연관이 있음을 부각시키는 모습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고 봅니다.

LIKEELL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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